[투데이 窓]암기식 방향, 이해식 방향

박동우 무대미술가·홍익대 공연예술대학원 교수
2025.04.16 02:05

박동우(무대미술가, 홍익대공연예술대학원교수)

무대에 선 배우에게 객석에 앉은 연출자가 방향을 지시한다. "왼쪽으로 가세요." 배우가 어느 쪽으로 가야 할지 순간 멈칫한다. "자기 왼쪽!" 극장에서 무대 왼쪽(stage left)은 객석을 향해 선 배우 자신의 왼쪽을 말한다. 서양에선 배우를 기준으로 방향을 정했다. 그들은 무대 앞쪽은 다운스테이지(downstage), 뒤쪽은 업스테이지(upstage)라고 한다. 르네상스 시기에 다시 지어지기 시작한 유럽의 극장에서 회화적 원근법을 완성하기 위해 무대 앞쪽보다 뒤쪽을 높게 무대 바닥에 경사를 뒀기 때문에 생긴 방향 개념이다.

한국의 무대용어는 서양 무대용어를 번역한 일본 무대용어를 다시 번역한 경우가 많다. 개화기에 일본을 거쳐 서양연극을 받아들이다 보니 저절로 그리됐다. 사회 여러 분야에서 그러하듯…. 그런데 무대방향은 그렇지도 않다. 일본의 극장에선 객석에 앉은 관객을 기준으로 방향을 정한다. 오른쪽을 상수(上手·오른손) 왼쪽을 하수(下手·왼손)라고 한다. 방송계나 영화계에서도 같은 말을 쓴다. 그래서 아직도 한국에선 무대 왼쪽을 상수, 무대 오른쪽을 하수라고 부르는 관습이 있다. 대학교에서도 그렇게 가르치는 경우가 많다. 그러니 아까 그 배우가 당황했을 만도 하다. 오래전 필자가 디자인한 무대 도면에 상수, 하수 대신 무대 왼쪽, 무대 오른쪽이라고 표기해둔 결과 무대장치의 좌우가 뒤바뀌어 설치되기도 했다. 극장문화가 뒤늦게 도입된 나라의 웃픈 에피소드다.

일상생활에서 방향착오는 어떨까. 대한제국 시절 1905년 처음으로 자동차 우측통행을 법제화했다. 그러나 1921년 조선총독부가 일본식 좌측통행으로 바꿔버렸다. 해방 후 미 군정이 다시 미국식 우측통행으로 바꿔 지금에 이른다. 그런데 미군은 보행자의 통행방향엔 별 관심이 없었는지 일제가 정한 보행자 좌측통행 규칙은 고치지 않고 그냥 뒀다. 그래서 자동차는 우측통행, 보행자는 좌측통행이라는 모순된 제도가 75년간 이어졌다. 자동차와 보행자의 중간쯤에 있는 자전거의 통행방향은 더 혼란스러웠다. 한강시민공원 자전거길은 관할구청에 따라 좌측통행과 우측통행이 혼재하기도 했다. 이런 불합리한 제도를 고치기 위해 필자도 신문 기고를 통해 보행방향 변경을 주장했다. 많은 불편을 겪은 끝에 2010년 드디어 보행자도 우측통행으로 바꾸게 됐다. 늦었지만 다행이다.

열차의 방향은 어떨까. 서울 지하철 1호선은 좌측통행, 2·3·5·6…호선은 우측통행, 신분당선과 경의중앙선은 좌측통행이다. 가장 기묘한 통행방향은 지하철 4호선이다. 서울 구간에서 남태령역까지 우측통행이던 열차가 선바위역에선 좌측통행이 돼 있다. 지하터널에서 상·하행선이 꽈배기 모양으로 꼬이면서 방향을 바꾼 것이다. 국철과 지하철의 연결부에서 통행방향을 일치시키기 위해 고안한 방식이다. 일제강점기 때 지어진 국유철도는 일본식으로 좌측통행이기 때문에 1호선과 수인분당선, 공항철도 등 일부 구간이 국철과 겹치는 선은 아직도 좌측통행이다.

무덤 하나를 쓰더라도 좌청룡 우백호를 따지던 우리는 디지털 시대에 이르러 점점 방향치가 돼간다. 급히 들어선 지하철역에서 좌우 어느 방향 개찰구로 들어가야 할지 당황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양쪽 다 전동차가 들어오는데 표지판엔 '석남행'과 '장암행'이라니…. 스마트폰을 들여다보지 않고서는 지하철의 그 많은 종점이 각각 어느 쪽인지 수십 년 동안 서울에서 산 필자도 암기하지 못하는데 관광객은 어떨까. 뉴욕 지하철처럼 동행(east bound) 남행(south bound) 등 동서남북 방향을 병행표시하면 어떨까. 출구번호도 뉴욕이나 도쿄처럼 동서남북 방향을 병행표시하면? 종점 암기식으로 돼 있는 현행 지하철 진행방향과 출입구 식별기호에 방향 이해식을 추가하면 좀 더 관광객 친화적인 도시로 서울이 바뀌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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