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PBS 폐지, 물길을 트다

오상록 한국과학기술연구원 원장
2025.08.25 05:10
이미지투데이

강줄기가 아무리 길고 힘차도 막힌 보(洑)가 있으면 강물이 고이고 힘을 잃는다. 우리나라 R&D(연구·개발) 현장은 지난 20여년간 'PBS'(경쟁형 과제 수주 제도)라는 보 앞에서 비슷한 상황을 겪었다. 과제를 따내야 인건비를 충당할 수 있는 구조 속에서 연구자는 실험실보다 행정 서류 앞에 더 오래 앉아 있어야 했다. 이번 PBS 전면 폐지가 막혀 있던 연구의 물길을 여는 계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PBS의 취지는 연구 자원의 낭비를 막고 과제 중심의 책임을 높이기 위한 것이었지만 시간이 지나며 부작용이 더 커졌다. 연구자는 원대한 계획보다 당장 '따올 수 있는 과제'를 먼저 고민해야 했고 장기적 안목은 단기 성과의 그늘에 가려졌다. "논문은 나중이고 우선은 제안서"라는 자조 섞인 현장의 목소리가 결코 농담이 아니었다. 이 구조는 특히 정부출연 연구기관에 큰 영향을 미쳤다. 출연연은 국가전략기술, 산업 인프라, 기초·원천기술 등 긴 호흡이 필요한 임무를 맡는다. 그러나 PBS 체계에서는 연구자가 각자 생존을 위해 분투하며 인건비 확보 경쟁에만 매몰됐고 '큰 그림'은 점차 희미해졌다.

PBS 폐지로 과제 단위의 각개 전투를 넘어 장기 미션을 중심으로 연구 체제를 정비할 절호의 기회를 얻었다. 다만 이번 정책은 단순히 R&D 예산 배분 방식을 조정하는 데 그쳐서는 안 된다. 제도의 껍데기를 바꾸는 데 머물지 않고 연구기관의 역할과 운영 원리를 근본적으로 재설계하는 계기가 돼야 한다. 기관별 장기 목표·임무를 기반으로 인건비를 안정적으로 확보하고 성과 평가는 과제 수주 실적이 아니라 목표 달성 정도를 기준으로 삼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이는 '성과로 평가하되, 자율로 운영한다'는 세계적 흐름과도 궤를 같이한다.

이 변화로 첫째, 연구 자율성이 살아날 것이다. 이제 연구자는 '과제를 수주하느냐'보다 '무엇을 발견하느냐'에 에너지를 집중할 수 있다. 둘째, 성과 중심의 운영이 가능하다. 단기 성과 경쟁이 아니라 국가와 인류에게 기여하는 성취가 평가의 기준이 된다. 셋째, 행정 효율성이 높아진다. 보고서 작성과 반복 심사에 들어가던 노력이 연구로 돌아간다. 이는 파급 효과가 큰 고품질 연구로 이어질 것이다.

지난해 초 출연연이 공공기관에서 지정 해제되며 자율과 책임 중심의 운영 철학이 비로소 자리 잡고 있다. PBS 개편과 함께 연구 현장의 숙원이 해소된 만큼, 이제는 연구기관이 임무 중심형 R&D를 통해 주도적인 혁신에 나설 차례다. 항해에 비유한다면 각 연구소가 목표지점을 향해 스스로 항로를 기획하고 실행 과정에서 조정해 신대륙을 발견하는 것이다. 선진국의 반열에 든 한국에 필요한 것은 기존 항로의 답습이 아닌 원대한 임무를 향한 탐사다.

국가 R&D의 기획·관리·평가 체계의 조정, 대학과 연구소의 역할 정립 등 제도 전환기에 해결해야 할 많은 과제도 있다. 그러나 물길이 트이면 작은 돌과 모래는 흘러가며 제자리를 찾아간다. 중요한 건 흐름을 되살리는 일이다. 이제 연구자들이 트인 물길을 따라 힘차게 노를 저어 새로운 지평을 향해 나아갈 차례다.

오상록 KIST(한국과힉기술연구원) 원장 /사진=K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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