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T시평]"어쩔 수가 없다"

이윤학 프리즘투자자문 대표
2025.10.17 02:05
이윤학 프리즘투자자문 대표

"그래, 와라 가을아." 25년을 종이 만드는 일을 하며 살아온 만수가 모든 것을 다 가진 듯 성경에 나오는 예수의 '가상칠언' 가운데 한 구절인 "다 이루었다"를 읊조리며 영화는 시작된다. 정작 그에게 닥친 것은 풍요로운 가을이 아니라 해고와 실직이라는 겨울이었다.

영화에서 만수는 우연히 만난 할머니가 툭 던진 한마디, "누군가 빠지면 공간이 생긴다"는 말에서 불현듯 본인의 생존전략을 세운다. 자신과 경력이나 실력이 거의 같은 실질적이고 잠재적인 경쟁자를 모두 없애버리기로 한 것이다. 박찬욱감독의 블랙코미디가 진하게 묻어나오는 영화 '어쩔 수가 없다'는 사실 이 시대의 슬픈 자화상이다. 자신을 해고하려는 외국인 임원은 "노 아더 초이스"(No Other Choice·어쩔 수가 없다)라 말하고 실직 후 만수는 이마를 두드리며 "어쩔 수가 없다"를 되뇐다.

이 영화를 관통하는 주제 중 하나가 '집단착각'(Collective Illusion)이다. 주인공 만수는 물론 그에게 죽임을 당하는 3명의 경쟁자 모두 종이를 만드는 일 외에 다른 일은 할 수 없다는 강한 집착과 착각을 한다. 사실 특정집단에서 통용되는 믿음은 그것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크게 중요치 않다. 진실보다 공유되는 믿음이 더 중요한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어떤 상황을 현실로 정의한다면 결과적으로 현실이 된다'는 '토머스정리'(Thomas Theorem)가 작동하는 경우가 많다.

최근 미국 S&P500지수가 사상 최고치를 경신했고 코스피지수도 사상 최고치인 3600선을 돌파했다. 지난 8월 이후 미국의 고용은 둔화조짐을 보였고 근원인플레이션은 3%대에서 내려오지 않았지만 금리인하에 대한 시장의 반응속도와 강도가 과거보다 훨씬 강해졌다. 실물은 아직 회복하지 않았지만 유동성과 기대감이 시장을 앞서가는 것이다.

사실 금리인하는 경기회복의 축하가 아니라 둔화의 인정이다. 역사적으로도 금리인하는 경기의 본격 회복보다 이미 진행 중인 경기둔화에 대응하는 조치로 나타났다. 2001년 닷컴버블과 2007년 서브프라임 사태 직전에도 그랬다. 당시 연준은 연속적인 금리인하로 대응했지만 결국 그 조치는 경기회복이 아니라 '위기완화'의 성격에 가까웠다.

지금 실물지표를 보면 미국 제조업PMI는 여전히 50선 이하에 머물고 소비자신뢰지수는 하락세를 이어간다. 한국의 수출반등 역시 반도체에 집중된다. 이익의 확산(Earnings Breadth)은 아직 나타나지 않고 시가총액이 큰 핵심 주도주에 의해 주가는 오른다. 즉, 이익의 확산이 아닌 '이익의 집중'이 추세를 만들어간다. 미국 S&P500지수의 상위 10개 기업이 전체 시가총액의 40%를 차지하고 한국도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전체 시총의 30% 수준이며 최근 상승분의 대부분을 책임졌다. 시장은 전체가 아니라 소수의 초집중으로 떠받쳐진 '불균형적 번영' 상태다.

그러나 투자자들은 비관보다 낙관에 베팅한다. 금리인하도, 미중 관세갈등도 모두 우호적인 관점에서 해석한다. '토머스정리'가 주식시장에서 작동하는 듯하다. 그러면 "어쩔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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