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데이 窓]윤동주와 릿쿄대학, 그리고 연극

박동우 무대미술가·홍익대 공연예술대학원 교수
2025.10.22 02:05
박동우(무대미술가, 홍익대공연예술대학원교수)

1985년 9월21일 국립극장, 50명의 북한예술단이 전후 처음으로 남한 무대에 올랐다. 그때 북한예술단을 이끌고 온 단장은 극작가이자 시인 백인준이었다. 그리고 그 국립극장은 남한의 극작가이자 연출가인 유치진이 건의해 1950년에 설립한 기관이다. 유치진은 이미 세상을 떠났기에 그들은 그 자리에서 만날 수 없었지만 그 둘의 공통점은 남·북한의 공연예술계를 대표하는 인물이었다는 사실이다. 또 한 가지 공통점은 윤동주와 같은 대학을 다녔다는 인연이다.

유치진은 1927년 도쿄 릿쿄(立敎)대학 영문과에 입학했다. 그는 '숀 오케이시 연구'를 졸업논문으로 내고 당시 유학 중이던 김동원, 이해랑, 이진순, 주영섭, 황순원 등과 함께 '동경학생예술좌'를 출범해 쓰키지(築地)소극장에 자신의 작품 '소'를 올렸다. 한편 백인준은 1938년 연세대를 거쳐 1941년 릿쿄대에 입학했다. 그는 재학 중 강제징집돼 전쟁터로 끌려갔고 다행히 살아남아 광복 이후 북한으로 귀향한다. 백인준의 릿쿄대 시절은 길지 않았지만 이곳에서 그는 매우 특별한 인연을 맺는다. 윤동주와의 인연이다.

윤동주 역시 연세대를 졸업한 후 1942년 릿쿄대에 입학했다. 그는 릿쿄대 시절 백인준과 같은 하숙집에 머문 인연이 있다. 유치진, 백인준 그리고 윤동주. 릿쿄대라는 한 공간에서 연극과 문학을 통해 시대의 아픔을 노래하려 한 이들은 훗날 엇갈린 운명의 길을 걷는다.

한국으로 돌아온 유치진은 '극예술연구회'를 발족하고 일제 치하에서 고통받는 농민의 삶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연극 '토막'을 올려 큰 반향을 일으켰다. 하지만 '학생예술좌'의 배후인물로 지목돼 일본 경찰의 혹독한 고문을 겪었고 이후 일제의 강압으로 '북진대' 같은 친일 연극을 만들어야 하는 암흑기도 지냈다. 1962년 그가 록펠러재단의 후원금에 사재를 보태 설립한 극장과 부설교육기관은 현재 '남산예술센터 드라마센터'와 '서울예술대학'으로 이어져 운영되고 있으며 수많은 명작과 연극인을 배출했다. 한편 백인준은 1946년 북한으로 돌아가 시, 희곡, 시나리오 등 다양한 장르를 통해 김일성 우상화에 앞장섰다. 그는 김일성으로부터 '조선의 마야콥스키'라는 극찬을 들으며 북한 예술계의 핵심 인물로 부상했고 '피바다' '꽃 파는 처녀' '당의 참된 딸' 등 북한이 자랑하는 5대 혁명가극을 그의 손으로 완성했다.

그 둘의 성공과 대조적으로 윤동주는 광복조차 보지 못했다. 릿쿄대를 다니며 8개월간 6편의 시를 쓰고 교토의 도시샤(同志社)대학으로 옮긴 그는 재학 중이던 1943년 독립운동을 했다는 혐의로 체포돼 후쿠오카 형무소에 수감됐다가 1945년 2월 광복을 6개월 앞두고 27세에 옥사했다.

1968년 윤동주의 모교 연세대에 시비가 세워졌다. 그 시비 앞에 꽃을 바치던 여고생 공지영은 연세대에 입학해 소설가가 됐고 그 시비에 감명받은 한강은 연세대 재학 시절 윤동주문학상에 당선돼 작가의 길을 걸었다. 1995년 2월 도시샤대학에도 그의 50주기를 맞아 시비가 세워졌다. 연세대에서와 마찬가지로 '서시'가 돌에 새겨졌다.

그로부터 다시 30년이 지난 2025년 릿쿄대 이향진 교수의 10년 노력 끝에 릿쿄대 교정에도 윤동주 시비가 세워졌다. 릿쿄대 편지지에 쓴 '쉽게 씌어진 시'가 새겨진 시비가 제막되던 지난 10월11일 도쿄에는 종일 비가 내렸다. 그를 지켜주지 못한 안타까운 역사와 그를 외면한 긴 세월이 비가 됐나 보다. 그날 저녁 연세극예술연구회 학생들과 릿쿄대 재학생들이 힘을 합쳐 연극 '미안해, 동주'를 릿쿄대 강당에 올려 다시 한번 관객들의 마음을 적셨다. 윤동주는 시를 통해, 연극과 영화를 통해 우리 곁에 살아 있다. 그리고 이제 도쿄에서도 그를 만날 수 있다.

늦어서 미안해, 동주 선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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