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T시평]조선 촌계가 알려주는 주민자치

채진원 경희대 공공거버넌스연구소 연구원·정치학
2025.12.09 02:05
채진원 경희대 공공거버넌스연구소 연구원·정치학

내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김민석 국무총리 등 여권의 서울시장 예비후보들이 세운4구역 재개발 문제를 두고 오세훈 시장을 집중적으로 비판했다. 이런 공방은 경쟁의 초점이 '어느 당 후보가 시장이 돼야 한다'는 진영대결이라는 점에서 지방자치가 여전히 중앙정치의 연장선에 있음을 보여준다.

이런 구도에서는 지역주민의 삶을 다루는 주민자치 의제가 자연스레 밀려날 수밖에 없다. 이제는 중앙정치의 대리전에서 벗어나 주민자치회를 어떻게 정상화할 것인가를 두고 정책경쟁을 하는 게 좋다. 그 방향을 찾기 위해서는 우리 역사 속에서 드러난 주민자치의 원형을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 특히 조선시대 촌계(村契)는 중앙집권적 행정체계에서도 기층민의 자율성과 연대를 지켜낸 중요한 사례로 주민자치에 주는 시사점이 크다.

조선시대 중앙과 지방의 관계는 왕, 관찰사, 수령으로 이어지는 관치행정이 기본이었지만 동시에 재지사족(在地士族)의 향약이 향촌사회를 이끄는 이중구조였다. 이런 관계는 독일 사회학자 하버마스가 말한 '생활세계의 식민화'란 개념과 유사하다. '생활세계의 식민화'란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대화하고 협동하는 생활세계가 행정과 권력의 논리에 의해 지배되는 현상을 뜻한다.

원래 향약과 촌계는 마을사람들이 필요에 따라 스스로 규약을 만들고 상부상조의 전통을 실천한 자율적 공동체였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향약은 주현향약처럼 수령의 지배 아래 놓였고 마을의 자치규범은 관의 명령과 교화로 대체됐다. 결국 생활세계는 식민화됐다.

그러나 생활세계는 완전히 죽지 않았다. 박경하 중앙대 교수 연구에 따르면 관 주도의 지배하에서도 자생적 촌계조직들은 끈질기게 살아남았다. 촌계는 두레·계·제사·축제 등 주민 스스로 운영한 자율적 협동조직이었다. 마을주민들은 공동노동과 상호부조, 분쟁조정과 장례 등 협동을 통해 자생적 생활질서를 창조했다.

하버마스의 관점으로 보자면 촌계활동은 행정체계가 왜곡한 의사소통 구조에 맞선 생활세계의 지속적 저항이었다. 촌계의 운영원리는 명령이 아니라 상호신뢰와 대화, 삶의 필요에서 비롯된 연대였다. 이런 촌계활동은 행정과 교화에 맞선 조선식 주민자치의 싹이었다.

이런 촌계의 경험은 오늘날 관치화한 주민자치회가 반면교사로 삼기에 충분하다. 전상직 한국주민자치학회장의 제안처럼 주민자치회 설치를 읍·면·동에서 통·반·리 수준의 생활권 단위로 내려 주민이 직접 참여하도록 해야 하며 회장 역시 주민직선제로 선출해 민주적 정당성을 확보해야 한다.

촌계처럼 주민들 스스로 회칙을 만들고 자유롭게 운영해야 비로소 생활세계의 자율성이 되살아난다. 주민자치회법과 지방자치법 역시 이런 방향으로 가야 한다. 촌계는 관의 지배 속에서 움튼 자유의 불씨이자 행정의 식민화에 맞선 생활세계의 저항이다. 오늘날 진정한 의미의 주민자치를 실현하려면 촌계가 남긴 '자유를 향한 생활세계의 대화'를 복원해야 한다. 주민자치회와 주민총회의 언어는 단순한 행정보고식 전달이 아니라 서로의 삶을 돌보고 자유롭게 소통하는 공론장이 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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