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 R&D(연구·개발) 사업에 대한 예비타당성조사, 이른바 '예타'를 직접 겪어본 연구자라면 누구나 비슷한 감정을 공유할 것이다. 반드시 추진되어야 할 연구개발 과제가 기획 단계에서만 2년 이상 소요되는 현실 앞에서 무력감과 자괴감을 느끼지 않은 연구자는 드물것이기 때문이다. 연구의 본질과는 거리가 먼 '비용–편익(B/C) 비율'이나 '계층분석법(AHP) 지표'가 국가 전략 연구의 운명을 좌우하는 장면을 보며 연구 전문가로서 답답함을 느낀 것도 사실이다.
R&D는 본질적으로 불확실성이 크다. 성공 여부를 사전에 계량화하기 어렵다. 또한 실패 가능성 자체가 지식 축적의 일부가 되는 특성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타 제도 하에서는 연구의 질보다 형식적 절차와 설명 논리가 우선했다. 많은 연구자가 실험실이 아닌 기획서와 보고서 작성에 시간을 쏟아야 했다. 이러한 이유로 R&D 예타 폐지는 연구 현장의 오랜 염원이었다.
다만 예타 제도의 폐지를 마냥 환영만 하기는 어렵다. 예타는 18년 전 국가 재정의 건전성과 대규모 사업의 무분별한 집행을 막기 위해 도입됐다. 그러나 최근 일부 사업의 추진 과정을 지켜본 입장에서, 충분한 검증 없이 예산이 집행된 사례도 있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검증 없는 속도 내기'가 또 다른 문제를 낳을 가능성이 있다는 뜻이다.
따라서 예타 폐지는 '통제의 제거'가 아니라 '통제 방식의 전환'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각 부처와 부서의 설립 취지와 전문성을 존중해 해당 분야의 플래그십 R&D를 기획하고 추진할 수 있는 자율성을 부여하는 것은 필요하다. 다만 그 과정에서 기획 권한이 특정 조직이나 개인에게 과도하게 집중되지 않도록 투명한 검증 구조와 명확한 책임 체계를 함께 설계해야 한다.
특히 연구 중간 조직의 역할에 대해서는 보다 신중한 재정의가 필요하다. 연구의 속도와 방향을 좌우하는 기획 단계에서 행정적 숙련도만으로는 기술적 판단을 대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현장의 연구 경험과 기술적 식견이 실질적으로 반영되지 않는 기획은 결국 또 다른 형태의 비효율을 낳을 수 있다. 연구 중간 조직은 '편의를 제공하는 행정 보조자'가 아니라, 결과에 대해 책임을 공유하는 전문적인 파트너여야 한다.
정부가 밝힌 것처럼 예타 폐지 이후에도 대규모 R&D에 대한 사전 점검과 유형별 맞춤형 관리 체계가 도입된다면 단순히 '빠른 R&D'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내실 있는 R&D'로 이어질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새로운 체계를 정착시키려면 기획부터 종료까지 사업 전 주기에 걸쳐 정교한 모니터링 시스템이 뒷받침돼야 할 것이다. 중요한 것은 제도의 폐지 자체가 아니라 이후를 어떻게 운영하느냐다.
우리는 추격형 R&D에서 선도형 R&D로 전환해야 하는 갈림길에 서 있다. 주요국이 R&D에 천문학적 투자를 쏟아붓고 있는 기술 패권 경쟁의 시대에 속도는 분명히 중요하다. 그러나 그 속도를 가능하게 하는 건 권한의 집중이 아니라 '전문성'에 기반한 분권과 책임이다. 결국 대한민국을 먹여 살려온 것은 연구개발을 통해 산업으로 이어진 기술의 축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