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T시평]간첩개념 재정립,방첩 정상화의 시작

배정석 성균관대 국가전략대학원 겸임교수
2026.03.27 02:00

형법상 간첩죄 기준을 '적국(敵國)'에서 '외국(外國)'으로 확장하는 법 개정이 지난달 이루어졌다. 73년 만의 이번 개정은 한국이 냉전적 사고에 머물러 있던 방첩 법제를 현실 세계로 끌어올려, 비로소 정상 국가의 방첩 체계를 갖추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동안 우리의 간첩죄는 '적국'이라는 개념에 묶여 있었다. 6.25 전쟁 직후인 1953년 법 제정 당시에는 이해될 수 있었겠지만, 현대 국제사회에서는 교전 중이 아닌 이상 '적국'은 없으므로, 평시 외국 정보기관의 명백한 국가안보 침해행위도 간첩죄 적용이 어려웠다. 중국이 우리 군 장교와 군무원을 포섭해 군사기밀을 빼갔을 때도 간첩죄로 처벌하지 못한 이유다. '중국은 적국이 아니다'라는 형식 논리가 법적 판단의 출발점이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행위의 본질이 간첩이었음에도 처벌 수위와 메시지는 현저히 약화 되었고, 이는 외국 정보기관에 한국이 방첩에서 취약한 공간이라는 신호를 주는 결과를 낳았다. 이러한 구조는 21세기 안보 환경과 전혀 맞지 않는다. 오늘날 모든 국가는 평시에도 군사·기술·외교·산업 정보를 체계적으로 수집한다. 외국의 간첩 행위를 적국이 아니라는 이유로 간첩죄로 다루지 않는 것은 명백한 방첩 주권의 포기다.

이제 대한민국의 안보를 침해하는 외국의 모든 정보활동은 간첩 행위로 규율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처벌의 문제를 넘어 예방과 억제의 효과를 갖는다. 외국 정보기관이 한국을 '쉽게 접근 가능한 공간'이 아닌 고위험 환경으로 인식하게 하여 활동을 위축시킬 것이며, 외국에 정보를 유출하는 내국인들의 경각심도 높아질 것이다.

아울러 이번 개정은 외교·안보 차원에서의 전략적 수단을 제공한다. 외국 정보요원에 대한 엄중한 처벌은 향후 스파이 교환이나 외교 협상에서 실질적 지렛대로 작용할 수 있다. 이는 이미 주요 국가들이 관행적으로 활용하는 방식이다. 2024년 8월 서방 국가들과 러시아는 18대 6으로 스파이를 교환했으며, 그해 11월에는 미국과 중국도 3대 3으로 교환했다.

중국은 2018년 화웨이의 멍완저우 부회장이 캐나다에 억류되자 즉시 캐나다인 2명을 간첩죄로 체포했는데, 이들은 2년 후 멍완저우가 캐나다를 떠나는 바로 그날 석방되었다. 방첩은 법 집행을 넘어 외교적 협상카드이기도 한 것이다. 법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협상력을 상실한다. 물론 표현의 자유와 학문·산업상 교류가 위축될 수 있다는 우려도 있다. 그러나 이는 법의 존재가 아니라 법의 운용 방식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다. 엄격한 구성요건 등 사법적 통제가 작동될 때 방첩은 민주주의와 충돌하지 않는다.

또 이번 개정은 끝이 아니라 출발점이다. 정보수집이 아닌 여론조작과 로비를 통한 영향력 공작(Influence Operation)에 대응하기 위해 외국대리인등록법(FARA) 제정이 시급하다. '국가핵심기술' 개념을 기반으로 기술 유출 시 간첩죄 적용도 확대해야 한다. 이와함께 방첩은 더 이상 특정 기관만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 시스템 전체의 문제라는 인식의 전환과 대국민 홍보도 필요하다.

이번 개정을 계기로 한국이 명실상부한 방첩 정상 국가로 자리 잡을 수 있을지, 이제는 실행의 정밀함과 국가적 의지가 시험대에 오른 것이다.

배정석 성균관대 국가전략대학원 겸임교수

<저작권자 © ‘돈이 보이는 리얼타임 뉴스’ 머니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AI학습 이용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