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 정세로 인해 에너지와 석유제품 원료의 수급이 어렵다는 뉴스가 연일 보도되고 있다. 쓰레기 봉투와 중동 전쟁이 의외로 깊은 연관성이 있듯이, 세계는 여러 가지 분야에서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이 '긴밀한 연결'이 뜻밖의 문제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중동 지역은 원유와 가스의 운반통로인 동시에 인터넷 케이블이란 디지털 시대의 핵심 동맥이 지나는 길목이다. 해저 케이블은 여러 가닥의 광섬유를 강철과 보호층으로 감싼 구조로 만들어지며, 최대 8000 미터의 심해에 설치된다.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대부분의 해저 케이블은 양 대륙 사이 최단거리인 중동의 홍해를 지나간다. 중동 지역에 군사적 충돌이 생기면 에너지는 물론이고 디지털 경제 분야에서도 세계는 큰 타격을 입을 수 있다.
지구 궤도를 도는 위성을 활용한 위성 통신을 통해 통신경로를 다양화하고 있긴 하지만 여전히 전세계 데이터 트래픽 중 97~99%는 해저 케이블에 의존한다. 해저 케이블은 가설 못지 않게 유지하기도 쉽지 않아서 매년 백여 건 이상의 파손 사례가 발생한다. 선박의 닻이나 저인망이 케이블을 끊는 사고가 있는가 하면 지진이나 산사태, 심지어 상어의 공격으로 케이블이 끊어지기도 한다. 해저 케이블 손상으로 국가 전체의 인터넷이 한 달 이상 끊어진 사례도 있다. 많은 국가들은 해저 통신 케이블 훼손을 대비해서 복수의 케이블을 연결해둔 상태다.
중동 지역 문제로 홍해가 막히면 이 지역을 지나던 배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 아프리카 남단의 희망봉 항로나 북극 항로로 우회할 수밖에 없다. 희망봉 항로는 기존의 경로보다 6천여 킬로미터 더 멀다. 다른 제약이 있긴 하지만 북극항로는 기존 경로보다 30%정도 가깝다. 인터넷 회선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홍해에서 문제가 발생하면 다른 경로를 찾아야 하는데 미국 등을 우회해서 연결하는 통로는 먼 거리를 지나야 한다. 인터넷 속도가 느려지고 통신 지연의 불편이 생길 수밖에 없다. 이 역시 거리가 짧은 북극 해저 케이블이 효과적인 대안인 것이다.
세계 각국은 이런 이유로 북극 해저 케이블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대표적인 프로젝트인 '폴라 커넥트(Polar Connect)'는 북유럽 5개국이 연합해서 유럽-북미-동아시아를 연결하는 데이터 네트워크를 건설하는 사업이다. 핀란드, 미국, 일본의 합작법인이 추진 중인 또 다른 프로젝트 '극북 섬유(Far North Fiber)'는 2029년 서비스 개시를 목표로 하고 있다.
북극 해저 케이블은 여러 가지 장점이 있다. 홍해, 남중국해 같은 병목지점을 우회해서 지정학적, 운영적 리스크를 최소화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상대적으로 가깝기 때문에 통신 지연시간도 35% 이상 단축된다. 각종 센서와 모니터링 장치를 통합시킨 스마트 케이블이 설치되기 때문에 해양, 지진, 기후 데이터 수집도 가능하다. 여전히 미지의 영역인 북극 심해 환경을 모니터링할 수 있고, 과학 연구 데이터를 모을 수 있으며, 해양 탐지 기술을 통해 안보에도 도움을 줄 수 있다.
AI 시대에는 데이터 이동 경로와 처리 위치 역시 중요한 국가전략이다. 실제로 우크라이나 전쟁 중에 국가 데이터 기간망이 사이버 공격으로 마비된 사례가 있다. 세계 10대 경제대국이자 디지털 경제 의존도가 높은 우리나라가 소수의 연결점으로만 국제 통신에 연결되어서는 안심할 수 없다. 또 우리 과학계는 CERN 강입자가속기 등 해외의 연구장비로부터 대용량의 데이터를 전송받고 있다. 국제 공동연구를 수행하려면 데이터 전송 속도가 빨라야 함은 물론이고, 혹시 일어날지 모를 장애도 미리 대비해 두어야 한다. 현재 우리 정부는 북극항로 사업을 국정과제로 추진하고 있다. 북극항로 사업과 함께 AI 주권의 중요 인프라가 될 북극 해저 케이블에 대한 투자도 꼭 필요하다고 본다.
이식 KISTI(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