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우타 사태로 드러난 '유럽 가치'의 민낯[기자수첩]

정혜인 기자
2026.08.11 04:09
이주민들이 7월30일(현지시간) 북아프리카 모로코에서 스페인령 세우타로 넘어가기 위해 바다로 뛰어들고 있다. 세우타는 북아프리카에 있는 스페인 영토로 모로코와 국경을 접하고 있다. /AP=뉴시스

유럽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반(反)이민 정책을 향해 '인권과 포용'을 외치며 대립각을 세웠다. 그러나 정작 자신들에게 국경 위기가 닥치자 냉혹한 현실 정치로 돌아섰다. 이들이 내세워 온 인권과 연대의 가치는 안보와 정치 논리 앞에서 빠르게 뒷순위로 밀려나고 있다.

최근 스페인령 세우타의 이민자 월경 사태는 그 현실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인구 8만 명 남짓한 소도시에 사흘 동안 약 6만 명이 몰려들었고, 대처 과정에서 세우타 당국 집계로 100여명이 목숨을 잃었다. 해안에는 시신이 잇따라 발견됐고 수용시설은 포화 상태에 달했다. EU(유럽연합) 각국에서는 즉각 반이민 정책 강화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민자 문제는 경제 불안과 함께 지난 몇 년간 유럽의 '아킬레스건'이었다. 독일과 프랑스, 네덜란드, 이탈리아 등에서는 이민 규제 강화를 내세운 우파 및 극우 정당의 영향력이 커졌다. 기존 주류 정당들 역시 국경 강화를 앞다퉈 강조한다. 이민 정책이 인도주의의 영역을 넘어 선거 결과를 좌우하는 핵심 정치 변수로 자리 잡은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세우타 사태는 이민 문제에 대한 유럽의 변화를 명확히 드러냈다. 그간 유럽 각국은 국경 통제를 강화하면서도 '인권'과 '연대'라는 원칙을 함께 강조해 왔다. 그러나 이번에 보인 것은 비극에 대한 애도나 연대감보다는 자국 내부 정치와 표심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책임 공방이 먼저였다.

일부 회원국은 스페인의 국경 관리 실패를 공개 비판하고 외부 국경 강화와 신속한 송환을 최우선 과제로 제시했다. 이탈리아는 자유통행 약속인 솅겐조약 적용 중단까지 거론했다. 이 조약을 맺은 유럽 국가끼리는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는데 스페인에 대해선 이를 적용하지 않겠단 것이다. 영국에선 군 병력 투입 가능성까지 거론된다.

유럽이 이처럼 자국 이익을 우선시하면서 '유럽적 연대'의 한계를 노출했다. 물론 국경 관리는 국가의 정당한 권리다. 하지만 유럽이 타국을 향한 비난과 봉쇄를 우선한다면 자신들이 강조해 온 가치의 설득력은 약해질 수밖에 없다. 세우타 사태는 결국 유럽이 미국처럼 '자국 우선주의'로 변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건으로 기록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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