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선 새로운 기업이 계속 나오잖아요. 미국 증시의 역사는 사실 기업의 세대교체 역사예요."
미국 주식시장은 올 들어서만도 이란 전쟁, 유가 상승, 국가재정 악화 같은 굵직한 악재 속에서도 주요 지수가 수차례 사상 최고치를 갈아치울 정도로 강했다. 그 비결을 취재하다 월가의 한 펀드매니저를 만났다. 그는 여러 이유를 꼽다가 끊임없이 등장하는 새로운 기업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한 기업이 시장의 정점에 오르는 동안 다른 기업은 그 뒤에서 실력을 키우고 지금의 1등이 주춤하면 다음 기업이 올라와 시장을 끌어올린다는 얘기다.
지난 십수년만 해도 애플이 스마트폰 시대를 열었고 아마존과 구글은 인터넷 산업의 판을 키웠다. 페이스북은 사람들의 관계를 바꿨고 테슬라는 자동차 산업의 경계를 흔들었다. 이제는 엔비디아가 인공지능(AI) 시대의 중심에 섰다. 미국 증시가 긴 시간 시장의 주도권을 잃지 않았던 데는 이런 끊임없는 세대교체가 있었다는 것이다.
한국 증시 풍경은 어떨까.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현대차 같은 이름이 벌써 사반세기 가까이 시장의 중심을 지켰다. 요샛말로 '고인물'이다. 지난 1년여 동안의 코스피시장 급등도 반도체 랠리를 빼놓고 설명하기 어렵다. '삼전닉스'가 지수를 끌어올리고 또 주춤하게 만들었다. 코스피지수 2000 시절과 견주면 숫자는 크게 올랐지만 시장을 떠받칠 새로운 산업과 기업의 폭은 여전히 좁다.
미국이라고 해서 새로 나오는 기업들이 족족 성공가도를 달리는 건 아니다. 오히려 새로운 기업이 쏟아지는 만큼 문을 닫는 기업도 많다. 엔비디아만 해도 순탄치 않았다. 1990년대 중반 첫 그래픽칩이 실패하면서 거의 파산할 뻔했다. 그때 살아남은 그래픽칩이 훗날 게임을 넘어 인공지능(AI) 시대의 핵심기술이 될 것이라고는 누구도 장담하기 어려웠다.
차이는 미국에선 실패한 기업인이 다시 투자금을 구하고 또다른 회사를 설립하는 장면이 낯설지 않다는 것이다. 투자자도 실패한 사업 하나로 기업인의 다음 도전을 끝내버리지 않는다. 기업이 사라져도 사람과 기술, 경험까지 함께 사라지지는 않는다. 한 회사에서 실패한 기술자가 다른 회사에서 다시 쓰이고, 실패한 창업자의 경험이 다음 투자자를 설득하는 이력이 되기도 한다. 실패의 잔해가 다음 기업의 자산으로 바뀌는 셈이다.
2년 전 회생법원을 취재할 때 만난 국내 한 기업인은 재기하기 전 고생했던 시절을 회상하며 "10년 동안 '실패자'라는 꼬리표를 달고 지냈다"고 말했다. 투자문화가, 제도가 10년의 벽을 만든 셈이다. 한 사람의 경험이라고 넘기기엔 익숙한 장면이 많다. 미국과 한국의 격차다.
기업 하나가 세워져 성장하는 과정에는 수많은 실패가 쌓인다. 미국 실리콘밸리의 비결은 실패하지 않는 기업이 많다는 데 있지 않다. 실패한 기업의 노하우가 다시 시장으로 흘러갈 수 있다는 데 있다. 실패한 기업의 폐업이 한 사람의 경력에 마침표를 찍는 게 아니라 다른 기업의 출발점이 되는 것이다.
고인물 기업이 끌고 가는 시장과 새로운 기업이 끊임없이 챔피언 벨트에 도전하는 시장은 겉으로는 비슷해 보여도 속은 천양지차다. 성공한 기업에 자본을 더 몰아주는 것만으로는 새로운 기업이 나오는 시장을 만들기 어렵다. 실패한 기업에서 무엇을 건져낼지, 사람과 기술이 어디로 다시 흘러가게 할 것인지를 고민해야 한다.
실리콘밸리와 월가에서 부러운 것은 오늘의 엔비디아가 아니다. 언젠가 엔비디아가 주춤할 때 그 자리를 차지할 기업이 지금도 어딘가에서 투자자를 만나고 있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삼성 다음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 이대로면 영영 미국을 부러워만 해야 할지 모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