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승민 새누리당 원내대표가 '진보적 보수'의 새 방향을 제시했다.
안보는 기존 보수진영의 가치를 유지하되, 경제정책의 시각은 기득권층에서 사회적 약자로 대폭 이동해야 한다는 뜻을 확고하게 밝혔다. 여권 내 '주류 보수'와 다른 목소리를 내왔던 새누리당 소장파의 본격적 입지 확장을 예고하는 것이기도 하다.
유승민 원내대표가 8일 국회 첫 교섭단체 대표연설에서 내놓은 제안은 여야를 막론하고 '충격'이라는 표현이 가능할 만금 대담하고 직설적인 것이었다. 그는 "보수의 새로운 지평을 열겠다"며 "재벌·대기업이 아닌 서민·중산층의 편에 서겠다"고 선언했다..
법인세 등 부자와 대기업에 대한 증세, 중소기업에 대한 대기업의 하청단가 인상,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 강화 등의 파격적인 경제 정책을 제안했다. 여당의 프리미엄을 버리고 야당과 합의의 정치도 강조했다. 1주기를 맞는 '세월호'를 감싸 안는 것도 잊지 않았다.
◇강력한 개혁 의지 천명…朴정부에 경고?
유 원내대표의 이번 대표연설에서 가장 주목되는 내용은 재벌·대기업에 대한 부분이다. 박근혜 정부 출범 당시 기대를 모았던 경제민주화와 재벌대기업에 대한 부패 척결 의지가 시들어가고 있다는 실망 속에 기존 여권의 주장보다 한층 강화된 개혁 의지를 천명했다.
일관되게 주장해왔던 증세 필요성을 재확인하면서 그 첫 단계로 법인세 등 부자와 대기업에 대한 우선 증세 방안을 밝혔다. 중산층에 대한 증세는 부자와 대기업 이후라는 원칙을 분명히 했다.
이에 대한 근거로 "재벌대기업은 지난날 정부의 특혜와 국민의 희생으로 오늘의 성장을 이뤘다"며 "우리나라의 부자와 대기업은 그들이 감내할 수 있는 수준의 세금을 떳떳하게 더 내고 더 존경받는 선진사회로 나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재벌 대기업에 대한 특혜를 부정하면서 이들 역시 개혁의 성역이 될 수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유 원내대표는 "가장 단순하면서도 강력한 재벌정책은 재벌도 보통 시민들과 똑같이 법 앞에 평등하다는 것을 실천하는 것"이라며 "재벌그룹 총수 일가와 임원들의 횡령, 배임, 뇌물, 탈세, 불법정치자금, 외화도피 등에 대해서는 보통 사람들, 보통 기업인들과 똑같이 처벌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박근혜 정부 들어 끊이지 않고 흘러나오는 대기업 총수 사면 가능성에 정면으로 경고의 목소리를 낸 셈이다. 새누리당 일각에서도 "지나치게 과격하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나올 정도다. 그만큼 유 원내대표의 재벌과 대기업에 대한 시각이 급진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중원'으로 성큼…소신이자 확신
유 원내대표는 경제 분야에서만큼은 확실한 '중도 색깔'을 내왔다. 대표연설에서도 복지와 양극화 해소 등에 대해 기존 새누리당 입지로부터 중도쪽으로 한걸음 옮겨가며 박근혜 정부의 경제정책과 차별화된 '유승민식 경제노선'을 재확인했다.
성장과 함께 복지를 경제의 또다른 한 축으로 규정하고 이에 따라 '중부담-중복지'를 목표로 삼아 "성장과 복지의 균형 발전을 추구할" 뜻도 나타냈다. 박근혜 정부의 '증세 없는 복지' 기조가 허구란 입장을 다시 한번 밝힌 것.
양극화 해소를 우리 경제의 가장 주요한 과제로 꼽으면서 노무현 전 대통령을 언급한 것은 또다른 파격이었다. 그는 "10년 전 노무현 대통령은 대한민국 대통령으로서 처음으로 양극화를 말했다"며 "양극화 해소를 시대의 과제로 제시했던 그 분의 통찰을 저는 높이 평가한다"고 말했다. 이명박 정부나 박근혜 정부 등 역대 보수정권과 경제정책이나 이념에 대해 분명한 차별성을 드러내기 위한 의도로 풀이된다.
노동 시장 양극화 문제 핵심인 비정규직 차별에 대해서도 "정부와 공기업부터 정규직 전환에 나설 것"을 주문했다.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중원의 이슈'라 말해왔던 사회적경제기본법 제정에 대한 소신도 빠트리지 않았다.
◇총선용 '립서비스'?…소장파의 전면 부상
유 원내대표의 '진보적 보수' 선언이 내년 총선을 앞두고 중도층으로 외연을 확장하기 위한 선거전략임을 부인할 수는 없다. 그는 원내대표 경선 당시에도 본인의 당선이 총선 승리의 기폭제가 될 것이라는 점을 내세웠고 총선 승리를 위해 서민과 중산층을 중심으로 중원을 지킬 수 있는 방향을 유지할 필요하다는 것을 수 차례 강조해왔다.
그러나 단순히 선거전략용 '립서비스'로 폄하하기는 어렵다는 것이 당 안팎의 평가다. 유 원내대표가 그동안 여권에서 보수진영의 주류와 다른 목소리를 내왔던 새누리당 소장파의 구심점 역할을 해왔다는 점에서 그렇다. 이날 대표연설에서 언급한 파격적 주장들 역시 소장파로서 그가 일관되게 이야기해왔던 것들이다.
유 원내대표가 이끄는 새누리당 소장파가 어느덧 당 안팎에서 중량감있는 자리에 포진해 당의 주역으로 올라섰다는 점도 '변화의 바람이 일시적으로 그치지 않을 것임을 예고한다.
이른바 '남·원·정'으로 불리며 새누리당 소장파의 상징이 된 남경필 경기지사와 원희룡 제주지사가 각각 지방자치단체장으로 협치의 정치를 실행에 옮기고 있고 정병국 새누리당 의원은 4선 중역으로 유 원내대표를 뒷받침하고 있다.
또한 '경제민주화실천모임(경실모)'과 사회적경제특별위원회에 몸담고 있는 초재선 의원들이 유 원내대표의 전면 등장과 함께 신(新) 소장파로 변화의 바람을 주도하기 시작했다.
새누리당 원내부대표인 한 초선 의원은 "유승민 원내대표의 대표연설이 지금은 파격적이라고 느껴지겠지만 앞으로 새누리당의 '바이블(성경)'이 될 것"이라고 자신감을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