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9일 서울 여의도에 위치한 제주도 서울본부 사무실에서 만난 원희룡 제주도지사(사진)의 볼이 빨갰다. 새벽 2~5시 서울 가락시장을 찾아 찬 바람을 맞은 탓이다. 시장 경매장에서 제주도 감귤의 경매 현장을 보고 가격 형성 과정과 입찰 반응을 체크했다고 한다. 원 지사는 "경매도 직접 해보고 관계자들과 함께 매운탕도 한 그릇했다"고 말했다.
이렇게 서울과 제주도를 수시로 오가며 도정을 챙기고 있지만 그의 마음은 요즘 편치 못하다. 자신이 몸담고 있는 새누리당이 국민들로부터 외면 받고 분당의 기로에 서 있기 때문이다. 그는 "제게는 부양가족이 있다"며 제주도정에 대한 책임감을 강하게 나타내면서도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할 정도"라며 당의 진로에 대해 많은 걱정을 털어놨다. 지난 2000년 16대 국회부터 남경필 경기도지사, 비박계 중진인 정병국 의원 등과 함께 '남·원·정'으로 불리며 원조 쇄신파로 당에 혁신의 DNA를 불어넣었던 그다.
원 지사는 "유승민 원내대표 사퇴 파동이나 4월 총선 공천 때 소위 '비박'들이 좀 더 결연하게 민심과 소통하면서 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해 친박 독식 구조가 되고, 견제 장치 없이 국정 농단의 막다른 골목으로 왔다"면서 "그러면 그때 원희룡은 뭐했나? 제주도 지사하고 있었다는 것만으로는 면죄부가 안된다. 너무나 통한스럽다"고 말했다.
-새누리당은 어디로 가야 하나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새누리당 안에서, 특히 탄핵 사태까지 오게 된 국정 농단 사태에 대해서 정치적으로 책임질 분들이 당연히 물러나줘야 한다. 그리고 좀 더 개혁적이고, 책임에서 좀 더 자유로운 사람들이 개혁 작업을 해나가야 한다. 당 운영 방식도 다시는 민심에 어긋나지 않도록 공천부터 국정, 당정 관계 등을 맘대로 농락할 수 없게 안전장치 만들어야 한다. 그런 부분에서 신뢰있는 사람들이 전면에 나서서 끌고나가야 한다. 만약 그게 안 되는 경우에는, 나중에 큰 길에서 하나가 되는 것을 전제로 분당이 불가피할 수 있다.
-친박과 비박이 인적 쇄신에 대해 생각이 다른 것 같다.
▶소위 친박 핵심은 국민 심판이 이미 끝났고 정리된 걸 확인하는 수순에 불과하다. 국회의원직 내지 당적을 박탈할 수 있냐는 건 이걸 강제할 힘이 있어야 하는데 이걸 가지고 끝까지 쟁점으로할 건 아니다. 더 중요한 건 보수의 주도 세력을 어떻게 바꿔낼 것인지다. 당 내에서 안 되면 당 밖에서 대선주자 중심으로 가는 수 밖에 없다. 일부 친박에 대한 부분을 안고 가기 위해 반영하고 타협하는 건 괜찮다고 보지만 과도하게 돼서 방향과 흐름이 실종되면 안된다. 혁신의 알맹이가 실종된다면 불가피한 결단을 내려야 한다.
-대선이 앞당겨질 것 같다. 대선 출마 여부는.
▶새해 정치와 국가상황이 어떻게 전개될지 모르기 때문에 국민이 원한다면 응답할 준비는 하고 있어야 한다는 원론적인 가능성만 열어두고 있다. 우선은 제주도지사로서의 책임을 가장 무겁게 받아들이고 있다. 결정적 계기는 1월 설 전후가 될 것으로 보고 있다. 반기문 유엔 총장 귀국 후 한, 두 달이 대한민국 국민과 보수진영에 가장 결정적 변수를 만들어낼 것이다.
-반기문 총장에 대해서는 어떻게 보나.
▶보수진영 내에서 수많은 주자들이 치열한 난타전을 벌이는 상황이라면, 국내 정치 경험이 없는 반 총장은 치명적인 한계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대통령 탄핵이나 조기대선으로 새누리당 내 대선주자들이 사실상 궤멸상태로 들어갔다. 본인 하기에 따라서는 유일한 대안으로 갈 수 있는 상황이 된 것으로 보인다.
-새누리당은 어떻게 이번 대선을 치러야 하나. 김무성 전 대표는 '신보수+중도' 연합을 제시했다.
▶지금의 ‘새누리당’으로는 대선 치를 염치가 없다. 결국 보수가 재편돼야 한다. 국민은 안중에 없고 오로지 대통령 구하기로 일관하는 정치집단은 2선후퇴를 하고 나머지 건전하고 합리적인 건강한 보수의 재편이 우선 필요하다. 신보수와 중도 연합은 그 다음 생각해도 늦지 않다. 대선도 중요하지만 제대로 된 보수, 중도, 진보의 길을 정치세력들이 먼저 보여줘야 한다.
-다음 대선의 화두는 뭐가 돼야 한다고 보나
▶우선 민주주의 회복이다. 보수도 당연히 순종해서 가야 한다. 민주주의의 가치를 우롱하는 보수는 시대의 뒤안으로 조용히 물러나야 한다. 그 다음 중요한 것은 기득권 부패다. 공적인 권력과 공적 자원들을 사적으로 남용하고 끼리끼리 공정성을 깨면서 자기들끼리 독식했다. 기득권 부패와 불공정 그리고 독식구조를 어떻게 깰 것인가에 대한 과감한 대책을 내야 한다. 극한 한계선에 와 있는 청년과 서민 경제에 대한 획기적 사회안전망 정책도 필요하다. 예를 들어 김종인 대표가 얘기하는 정도의 경제민주화나 민생안정 방안은 보수에서도 당연히 수용해야 한다.
-이번 기회에 유승민, 남경필, 원희룡, 오세훈 등 50대 기수들이 보수 진영의 세대 교체를 이뤄내야 한다는 시각도 있다.
▶최순실 게이트를 바라보면서 세대의 문제라는 생각도 들었다. 50대 이하 세대에서는 그런 식으로 국정을 농단하라고 해도 할 수가 없다. 그런 식으로 돌아가는 것을 경험하지도 못했고 상상한 적도 없다. 진보든 보수든 내용적으로는 세대 교체를 해야 한다. 이제 국민들은 좌우 진영을 뛰어넘는 협력정치를 원한다. 누가 대통령이 되더라도 권력 분점, 연정과 협치, 획기적인 지방분권 실천을 통해 국력소모를 줄이고 정치안정을 이뤄내야 한다. 50대 기수들은 민주화 시대를 거치면서 권위주의를 깨고 수평적인 소통·토론문화에 익숙한 세대다. 우리 세대를 통해 시대교체와 세대교체를 동시에 이뤄낼 필요가 있다.
-내각제 개헌을 선호하는 걸로 아는데.
▶어떻게든 권력을 분산하고 정쟁 완화시키도록 개헌을 해야한다. 당장은 더디게 갈 수는 있겠지만 권력을 나누고 공동으로 정부를 운영하는 것이 결과적으로는 훨씬 효율적인 길이라는 것을 유럽의 내각제 국가들이 보여주고 있다. 누가 대통령 후보가 되든 대통령의 권력분산과 정치개혁, 특히 선거 제도와 국회의원 공천 개혁에 대한 진지한 약속을 해야 한다. 개헌을 생각하는 대선 주자들이 방향과 일정을 포함하는 정치개혁 MOU를 국민에게 제시하고, 다음 총선 시기에 맞춰 실현이 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취임 2년 반이 지났다. 그 동안 제주도는 어떻게 달라졌나.
▶인구, 관광객, 투자, 이전기업이 급증해 최근 경제성장은 6%대를 기록 중이다. 수십 년간 정체됐던 성장이 최근 몇 년 사이 급격하게 진행됐다. 성장 동력을 키우는 일도 중요하지만 원래 제주가 가진 가치도 잘 지켜야 한다. 무엇보다 제주의 자연환경은 황금알을 낳는 거위다. 무분별한 투자유치, 저가관광 등 제주다움을 살려야 하는 부분은 과감히 손질했다. 성장통도 만만치 않았다. 양극화 해소, 인프라 확충 과정에서의 갈등은 풀어야 할 숙제다.
-취임 때 중국 자본의 무분별한 개발을 막겠다고 하셨다. 어떤 조치를 취했고, 성과는 어땠나.
▶무분별한 개발을 막겠다는 것이 중국 자본 자체를 배척하겠다는 것은 아니다. 취임 직후 대규모 투자사업에 대한 기본방침 발표하면서. 휴양, 헬스, 청정에너지 등 미래가치 산업 중심의 투자유치 방향을 설정하고, 한라산, 해안선, 오름, 동굴 등 제주가 지켜야 할 환경자산도 정했다. 관광개발사업 가이드라인을 마련해 투자유치 3대원칙(환경보호, 투자부문간 균형, 제주미래가치 높이는 투자)도 발표했다. 그 결과 분양사업과 같은 1회성 투자, 청정자연을 해치거나 발전계획이나 수용용량을 넘어서는 투자는 불허한다는 인식이 확산될 수 있었다.
-사드 배치 결정 영향은 어떤가.
▶아직은 괜찮지만 조금씩 영향을 받기 시작한 단계다. 올 11월말까지 중국인 관광객은 289만명이 제주를 찾았다. 작년과 비교해 38% 이상 증가한 수치다. 중국에서 오는 크루즈 관광객이 약 100만명을 차지한 결과다. 하지만 사드와 관련해 한류 금지령, 관광객 20% 감축 등 암묵적인 경제보복 조치들이 나오면서 중국관광객 증가세가 주춤해지고 있다. 대안으로 일본시장 직항노선 확충과 신세대 대상 프로그램 마련, 동남아와 러시아 등 새로운 시장 개척을 통해 시장 다변화에 나서고 있다.
-시민복지타운 내 행복주택 건설을 놓고 논란이 있다.
▶제주도는 급격한 성장으로 부동산 가격도 다른 지역에 비해 몇 배 이상 빠르게 상승했다. 도민들의 내 집 마련도 그만큼 더 힘들어졌다. 그래서 국가 예산과 제주도 예산을 투자해 주변 시세보다 저렴하게 임대하는 정책이 행복주택이 필요했다. 일부에서는 임대주택으로 쓰기에도 아깝고 교통체증 우려도 한다. 하지만 행복주택사업이 지역발전에 도움이 되면서 사회적 문제를 해소해 나가는데 도움되도록 할 것이다. 공공목적 시설 함께 짓고 교통난 해소 위한 대안 모색할 예정이다.
-제2공항 건설 사업이 얼마 전 예비타당성 조사를 통과했다. 그동안 부지 주민들의 반발이 적지 않았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이견차를 좁히는 것이다. 지역주민들이 제기한 수산굴 등 환경문제는 기본계획을 수립할 때 정밀하게 검증이 되도록 하겠다. 제2공항과 주변지역의 미래는 해당 지역주민들과 함께 밑그림을 그릴 것이다. 타당한 요구들은 공항건설 과정에 적극 반영하고 주민들의 아픔과 희생을 아우르겠다.
[원희룡 제주도지사는 누구]
원희룡 제주도지사는 제주도 서귀포에서 태어나 줄곧 제주도에서 자랐다. 제주 제일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82년 학력고사에서 수석을 차지하면서 서울대학교에 법대에 입학해 이름을 알렸다. 대학 생활 동안에는 학생운동에 몰두했고, 공장 노동자로 취업해 노동운동을 이끌기도 했다.
이후 원 지사는 1992년 34회 사법고시에서도 수석 합격해 검사로 활동하다 2000년 16대 총선에서 한나라당 소속으로 서울 양천갑을 지역구로 출마, 당선되며 정계에 입문했다. 당시 학생운동 경험에도 보수정당에서 정치를 시작하면서 비판을 받기도 했다. 원 지사는 초선 때부터 당내 개혁과 쇄신에 적극 나섰다. 한나라당 내 개혁그룹인 '미래연대' 공동대표를 맡았고 개혁 성향으로 16대에 이어 17대, 18대까지 내리 당선됐다. 당 최고위원·사무총장·쇄신특별위원회 위원장 등을 역임했다. 2007년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 경선과 2010년 한나라당 서울시장 후보 경선에 나섰다가 고배를 마셨다. 이후 2년간 정계를 떠나있기도 했지만 지난 2014년 고향인 제주도에서 지사에 당선됐다.
△1964년, 제주 서귀포 생 △제주제일고·서울대학교 공법학 학사·한양대학교 언론정보대학원 뉴미디어 석사·제주대학교 대학원 정치학 명예박사 △34회 사법고시 합격 △16·17·18대 국회의원 △17·18대 한나라당 최고위원 △제17대 대통령 한나라당 경선 후보 △현 37대 제주특별자치도 도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