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사들이 법률적인 판단을 할 수는 있지만 행정사무를 처리하는 전문가는 아니다. 그간 '중립성'에만 선관위 업무의 초점을 맞춘 게 문제다."
10일 판사 출신 한 변호사가 투표용지 부족 사태와 관련해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의 '거버넌스'(지배구조) 문제를 지적하면서 한 말이다. 중앙선관위원장은 1963년 창설 이래 줄곧 현직 대법관이 비상근으로 겸직하는 게 관례였다. 나머지 8명의 중앙선관위원도 상임위원 1명을 제외하면 비상근으로 법조인 출신이 많다. 선거 관리의 '중립성'과 '공정성'을 보장하기 위해 법조 출신 비상근·겸직 구조가 이어져 온 것이다.
문제는 판사들이 투표용지 인쇄와 투표소 인력 배치 등 현장 운영 전문가는 아니라는 점이다. 선거법 위반 여부 등에 대한 판단 과정에선 판사 출신 선관위원장과 선관위원들의 전문성이 발휘되지만 나머지 행정업무는 선관위 사무총장 등 행정 담당자들이 맡는다. 비상근·겸직 구조에선 조직 장악력이 떨어지고 내부 통제·관리에 허점이 생길 수밖에 없다. 이번 투표용지 부족 사태의 원인을 선관위 지배구조와 조직 관리 측면에서 찾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는 배경이다.
정치권에서도 선관위원장 상근화 논의가 시작됐다. 책임 소재와 조직 통제 강화로 위기대응 능력을 높이려면 선관위원장 상근화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지난 8일 이재명 대통령과 4부 요인 만남 과정에서도 선관위원장 상근화 논의가 이뤄졌다.
헌법 제114조에 따르면, 중앙선관위는 대통령 임명 3명, 국회 선출 3명, 대법원장 지명 3명 등 총 9명의 위원으로 구성된다. 위원장은 위원 중에서 호선하도록 명시돼 있다. 대법관인 선관위원이 위원장을 맡는 것은 법 조항에 명시된 규정이 아닌 관례다. 다만 선관위법은 선관위원장의 법적 지위를 비상임으로 정하고 있다. 상임위원 1명만 상근으로 두도록 했다. 따라서 헌법 개정이 아닌 법률 개정만으로도 상근 선관위원장을 둘 수 있다.
선관위원장 상근화 법안도 이미 발의돼 있다. 김민전 국민의힘 의원이 발의한 선관위법 개정안은 선거 관리 업무 집중을 위해 법관이 각급선관위원장으로 호선돼 겸직하는 것을 막고 상임화를 추진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더불어민주당도 오는 16일 선관위 업무 보고 등을 받은 뒤 공직선거법 개정 등 제도 개선에 나선다는 방침이다. 민주당은 개헌 가능성도 열어두고 있다. 선관위가 감사원의 감찰을 받도록 하거나 위원회 구성 자체를 바꾸려면 개헌이 필요하다.
장영수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지금처럼 위원장을 포함한 중앙선관위원 대부분이 비상임인 체제에서는 조직 관리가 느슨해질 가능성이 크다"며 "중앙선관위가 지역 선관위까지 실질적으로 관리·통솔하려면 상시적으로 업무를 들여다보고 책임질 수 있는 구조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다만 상근 선관위원 도입의 필요성엔 공감하면서도 중립성 확보 방안이 전제돼야 한다고 조언했다. 정치적 중립성이 흔들릴 경우 상근직을 도입하는 의미가 퇴색할 수 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