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과 중국을 핵심 축으로 하는 '세력 정치'가 대두되면서 한국이 강력한 억제력을 바탕으로 한 '소극적 평화'를 유지해야 한다는 제언이 나왔다.
송민순 전 외교통상부 장관은 15일 서울 종로구 아산정책연구원에서 열린 '제8회 한반도미래포럼 심포지엄' 기조연설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재집권하면서 관세전쟁, 그린란드와 캐나다 합병 주장, 그리고 중동전쟁에 이르기까지 미국이 보여준 행동으로 인해 동맹망이 과거 수준으로 재건될 가능성이 희박해지고 있다"고 밝혔다.
이어 "중동전쟁 이후 미국이 해외에 개입할 명분의 기준인 '사활적 이익'의 범주를 더욱 좁게 설정할 가능성이 커졌다"고 했다.
그는 "세력권 국제질서가 형성되는 상황에서 강대국의 세력 다툼이 직접 전개되는 현장은 동아시아"라고 진단했다. 그러면서 "한미일에 대응하는 북중러 진영이 일종의 군사 블록의 형태로 발전할 조짐을 보이고 있다"며 "중국의 국가전략문서나 북중 정상회담에서 '한반도 비핵화'가 사라지고 있는 건 북한의 핵능력이 중국으로서 짐이 되기보다 동아시아 진영 간 대립에서 하나의 자산으로 간주되고 있다"고 말했다.
송 전 장관은 중동전쟁 이후에도 미국이 중동에 느슨한 관여가 이뤄짐에 따라 동아시아 대응 역량이 분산될 것으로 전망했다. 이에 대비해 중국은 동아시아에 자신들의 역량을 집중시킬 수 있는 만큼, 한국과 일본의 지역방위역할 증대는 불가피하다고 설명했다.
북한의 적대적 두 국가 노선과 핵무력 고도화는 한국의 대응역량 제고를 부추긴다고 봤다. 북한 비핵화 자체가 논의되기 어려워졌으며 북미 정상회담은 불확실하고, 북한의 대중(對中) 의존도도 높아지면서 한반도에서의 미중 간 세력 갈등은 심화할 수밖에 없다고 분석했다.
송 전 장관은 한국이 상황을 냉정하게 판단하고, 평화적 공존이 아닌 '소극적 평화' 전략을 구사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소극적 평화를 구사하기 위한 조건으로 △전시작전통제권의 조기 전환 △한국의 농축 우라늄 및 사용후핵연료 재처리 권한 확보 △한미 동맹 기조의 흔들림 없는 유지 등을 제시했다.
끝으로 송 전 장관은 "경제·군사·기술적 역량을 한국이 가진 지정학적 강점과 결합해야 한다"며 "한국이 새로 전개되는 세력 판도에서 자율성을 가지고 중견국으로서의 입지를 다져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어진 '이란전쟁과 국가안보의 미래' 세션에선 중동전쟁에서 확인된 전쟁 전략 변화와 미국의 대응 역량 한계에 따라 한국은 물론 북한도 안보 전략을 바꿀 것이란 분석이 제기됐다.
이호령 한국국방연구원 책임연구위원은 북한이 중동전쟁에서 미국의 취약점을 학습하고 한반도에 적용할 것으로 전망했다. 드론과 미사일을 활용한 '섞어쏘기' 전략으로 방공망을 소진하는 전투를 벌일 가능성을 거론했다.
이와 함께 이 위원은 북한은 중동전쟁을 통해 핵 보유가 자신을 실질적으로 보호할 수 있을 것으로 학습했다고 분석했다. 그는 "북한은 핵의 불가역화·법제화 또 육상에서 해상까지 핵무장을 확장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며 "중동전쟁을 통해 지도부의 참수를 대비하기 위한 방공력 강화, 기지 타격을 대비한 지하화 등으로 정책을 발전시킬 가능성이 높다"고 설명했다.
아울러 허태근 전 국방부 국방정책실장은 중동전쟁으로 인해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 확대 가능성이 확인된 만큼 세력 간 억제력에서의 격차가 발생할 수 있다고 진단했다. 미국의 대중국 억제와 관련된 동맹에 대한 방위 분담 요구에 한국으로서 창의적 대응 방안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이어서 신각수 전 외교부 제1차관을 좌장으로 한 두번째 세션에서는 '트럼프 2기 대외정책 동향과 국제질서 전망'을 주제로 국제 정세의 변화 등이 다뤄졌다. 신 전 차관을 비롯해 전문가들은 국제정세가 동아시아·유럽·중동이 긴밀히 연결돼서 움직임에 따라 한국의 기민한 외교안보 정책 대응 역량이 필요하다는 제언을 내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