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란으로 바위치기, 바위는 죽은 것이지만 계란은 살아서 바위를 넘는다."(영화 '변호인'에서 주인공 송강호와 임시완의 대화 중.)
1981년 9월 부산에선 학생·교사·회사원 등으로 구성된 사회과학 독서모임이 진행되고 있었다. 어느 날 이들의 모임에 날벼락이 떨어졌다. 부산 지검 공안이 이 모임 구성원들을 영장도 없이 체포한 것. 이적서적을 소지하고 공부모임 등을 통해 반국가단체를 찬양·고무한 혐의라고 했다.
앞서 그해 3월 출범한 군사 독재 정권은 집권 초기 통치 기반을 확보하기 위해 민주화 운동 세력을 무자비하게 탄압했다. 이 과정에서 무고한 시민들의 희생이 이어진 것.
끌려간 곳에는 이들만 있는 게 아니었다. 계엄령에 금지된 집회를 하거나 사회적 불안을 야기하는 집회에 참가했다는 혐의로 체포된 이들이 십여명 더 있었다. 체포된 총 22명 중에는 실제로 민주화 운동을 벌이던 이들도 있었지만 단순 독서모임이나 다방에서 만나 대화를 나누다 끌려온 이들도 포함됐다.
평범한 일상을 지내던 시민들이 갑자기 정부 전복을 꾀하는 반국가단체로 몰리게 된 것이다.
이들은 짧게는 20일에서 길게는 63일 동안 불법으로 감금해 구타·고문을 당했다. 당시 검사 측은 이들에게 국가보안법·계엄법·집시법(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를 적용해 징역 3~10년을 구형했고 재판정은 5~7년의 중형을 선고했다.
이 조작 사건은 '부산의 학림사건(5공화국 시절 대표적인 공안사건)'이란 뜻에서 '부림사건'으로 불려왔다.
당시 이들의 변론은 부산에서 변호사로 활동하던 고 노무현 전 대통령과 김광일 변호사 등이 무료로 맡았다. 특히 노 전 대통령은 고문당한 학생들을 접견하면서 권력을 가진 이들의 횡포에 분노, 이후 본격적인 인권변호사의 길을 걷게 됐다.
이 사건으로 옥고를 치른 이들은 1983년 12월 전원 형집행 정지로 풀려났고 이후 부산 민주화 운동가로 활동했다. 하지만 그들의 죄는 사라지지 않았다.
사건 피해자들은 1999년 사법부에 재심을 청구했지만 기각됐다. 이후 2006년 '5·18 민주화운동 등에 관한 특별법’을 근거로 재항고해 2009년 대법원에서 계엄법 위반 등의 혐의에 대해서만 무죄를 선고받았다. 국가보안법과 반공법에 대해선 재심 사유가 되지 않는다는 판결을 받아 일부 승소했다.
이후 남아있는 유죄판결에 대한 재심을 청구해 부산지법에서 모든 혐의에 대해 무죄판결을 받았다. 검찰 측은 국가보안법과 반공법 위반 혐의 부분을 근거로 대법원에 항소했다.
결과는 전원 무죄. 2014년 9월25일 대법원은 재심 상고심에서 전원 무죄를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 33년 만에 받은 무죄 판결이었다.
재판부는 "피고인들이 수사과정에서 공소사실을 모두 자백했지만 상당기간 불법 구금되는 등 자유로운 상태에서 진술했다고 볼 수 없어 증거능력이 인정되지 않는다"며 "믿을 수 있는 증거가 없으므로 공소사실 모두를 인정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이어 "이들의 행위가 국가의 존립·안전이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해악을 끼칠 명백한 위험성이 있었다고 보기에는 부족하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올 7월 부산지방법원은 부림사건의 피해자였던 이호철 전 대통령비서실 민정수석비서관에게 국가가 3억7000여만원의 위자료를 배상하라는 판결을 내리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