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 모은 딸 결혼식 자금을 전화 한 통에 털렸어요."
울산 지역에서 거주하는 A씨(70대)는 최근 보이스피싱 범죄에 속아 딸의 결혼식 자금 6000만원을 모두 잃었다. 조금이라도 좋은 옷을 입혀 좋은 식장에서 해주려다 '대출을 저금리로 해주겠다'는 말에 속은 것이 화근이었다. A씨의 휴대전화에 설치된 악성 앱은 전화 한 통에 A씨가 평생 모았던 돈을 빼갔다.
20년 경력의 베테랑 수사관 정태영 울산경찰청 반부패경제범죄수사대 경위(48)는 이 사건을 맡자마자 '뭔가 이상하다'는 직감이 머리를 스쳤다. A씨에게 전화를 건 휴대전화가 지적 장애를 가진 사람의 것이었기 때문이다. 정 경위는 동료들과 함께 1달 넘도록 밤을 꼬박 새워 수백대가 넘는 CCTV를 들여다보며 이 사건에 매달렸다.
결국 정 경위는 피해 금액만 최대 수천억원대로 추정되는 '대포폰(등록자와 사용자 명의가 다른 휴대전화) 일당'의 덜미를 잡았다. 이들은 지적 장애인·노숙자들의 명의를 이용해 대포폰을 만들고 '유령 법인'을 개설, 대당 100만원이 넘는 금액으로 대포폰을 팔아넘겼다. 전국을 누빈 '대포폰 일당'은 체포됐으나 정 경위는 아직도 수사에 매달리고 있다. 이 '대포폰'을 구매한 보이스피싱 조직도 잡아들이기 위해서다.
이들 일당은 지난해 8월부터 지난 달까지 울산과 부산, 수원 등 대도시를 누비며 지적 장애인과 노숙자, 신용불량자에게 '명의를 빌려달라'며 접근했다. 포털 사이트나 온라인 커뮤니티에 글을 올려 일당의 구성원을 모집했으며, 구인·구직 사이트를 사용해 현금 수거책을 채용했다. 나이가 어린 사회초년생들은 이들에게 속아 일당의 손발 노릇을 했다.
일당은 상하관계 없이 조직원 모두를 '실장' '사장' 등으로 부르며 전국에서 명의 대여자를 모았다. 20여명의 명의 대여자에게 1명당 50만원~100만원씩을 주고 명의를 빌린 뒤 유령법인 200개를 만들었다. 법인당 최대 100대까지 대포폰을 만들 수 있다는 점을 악용한 수법이다. 불과 20여명에게서 빌린 명의로 5000대의 대포폰이 뚝딱 만들어졌다.
이렇게 만들어진 대포폰은 '실장'들이 보이스피싱 조직에 거액의 금액을 받고 팔아넘겼다. 휴대전화는 1대당 100만원~120만원이었으며 유선전화기는 100대당 최대 300만원~400만원에 팔렸다. 5000여대의 대포폰 중 3500여대가 범죄에 사용됐으며, 1대당 최대 1억원의 범죄 피해액이 발생했다.
정 경위는 조직폭력배를 상대했던 경험을 살려 조직 아랫부분부터 차근차근 수사를 개시했다. '실장'들의 근거지를 급습하기 위해 경상도·충청도·경기도를 수도 없이 오갔으며 CCTV(폐쇄회로TV)를 눈이 벌개질 때까지 수백번 넘게 들여다봤다. 정 경위는 "1건의 보이스피싱에서 전국 규모의 조직을 찾아낸 셈"이라며 "피해액이 수천억원까지 늘어날 수 있어 빨리 잡아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했다.
그 결과 몇몇 '실장'의 덜미를 잡았으나 이들은 범죄가 드러나 형량이 높아질 것을 두려워해 입을 굳게 다물었다. 정 경위는 총책을 검거하기 위해 철저히 증거를 모아 그들의 눈 앞에 들이댔다. 밤을 새워가며 모은 사건 관련 기록만도 1만 페이지가 넘는다. 결국 '실장' 들은 하나 둘 입을 열기 시작했고 일당을 이끄는 조직의 윤곽이 드러났다.
정 경위와 울산청 반부패경제범죄수사대는 휴대전화만 6대를 사용하던 30대 총책과 '실장' 등 11명을 입건하고 그 중 9명을 검거했다. 전국을 휘젓던 '대포폰 일당'이 일망타진된 것이다. 정 경위는 "살인에는 흉기가 사용되는 것처럼 보이스피싱의 범행도구는 대포폰"이라며 "다행히 총책 등 일당을 전원 검거할 수 있어 더 큰 피해를 조기에 막을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정 경위는 이제 '대포폰 일당'에게서 전화를 구매해 범죄를 저지르는 보이스피싱 조직의 뒤를 쫓고 있다. 조금이라도 빨리 보이스피싱 조직을 검거해야 새 피해자가 발생하는 것을 막을 수 있다는 생각에서다. 울산에서 근무하지만 서울부터 경기도, 충청도, 강원도 등 어디든 범죄자가 있는 곳이라면 밤낮을 가리지 않는다. 밤낮으로 CCTV를 보다 보니 눈이 나빠져 운전대도 잘 못 잡게 됐다.
그러나 정 경위는 모든 공이 동료들 덕분이라고 고개를 내젓는다. 팀 모두가 하나가 되어 이룬 성과이지 자신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정 경위는 "기사에 저보다는 윤종도 대장님과 김현석 팀장님, 서진석·공창걸·이충환 등 우리 팀원들 이름을 꼭 넣어달라"며 "저는 그냥 해야 하는 일 한 거고, 항상 밤새워 근무하는 동료들이 칭찬을 들었으면 한다"고 했다.
정 경위는 "국민 여러분 근처에는 언제나 경찰관이 가장 가까이에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라며 "어떤 범죄가 발생하던 반드시 경찰을 믿고 손을 내밀어 주시면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