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가 사라졌다."
2023년 3월 22일. 필리핀에서 15년간 목회 활동을 한 60대 목사가 법정에 섰다. 목사는 아내를 살해하고 시신을 은닉한 혐의를 받는다. 그는 가족들에게 이같이 말하며 자신의 범행을 감추려 했다. 하지만 이내 실종신고가 접수됐고 경찰이 수사에 나서며 불륜·살해·암매장을 저지른 그의 추악한 민낯이 세상에 드러났다.
사건은 2022년 8월 필리핀에서 벌어졌다. 대전 한 교회 목사였던 A씨는 선교 활동을 위해 아내와 현지에 머물며 돼지 사육장 등을 운영해왔다. 겉으로는 평온한 선교사 부부였지만 실제로는 오랜 갈등을 겪고 있었다.
갈등 배경에는 A씨의 불륜이 있었다. 그는 필리핀 현지 20대 여성과 부적절한 관계를 맺고 있었고 이를 의심한 아내와는 대화조차 어려울 정도로 관계가 악화한 상태였다.
범행 당일 두 사람은 집 안에서 말다툼을 벌였다. 아내가 "목사로서 자격이 있느냐"고 따져 묻자 A씨는 격분했다. 결국 그는 주변에 있던 둔기를 들어 아내를 여러 차례 때려 살해했다.
범행 직후 A씨는 시신을 비닐과 나일론 끈으로 감싼 뒤 자택 인근 돼지 사육장 근처에 구덩이를 파 암매장했다. 그 뒤 그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일상으로 돌아갔다.
A씨는 범행 한 달 뒤인 9월 무렵부터 한국에 있는 가족과 지인들에게 "아내가 실종됐다"고 거짓말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A씨 아내 가족이 실종 신고를 한 것이다.
경찰은 필리핀 경찰과 공조해 수사를 벌였고 수사망이 좁혀지자 A씨는 주필리핀 한국대사관을 찾아가 스스로 범행을 털어놨다. 이후 국내로 송환된 A씨는 구속 상태로 재판에 넘겨졌다.
검찰은 대전지법 형사12부(나상훈 부장판사) 심리로 열린 결심 공판에서 A씨에게 징역 30년을 구형했다. 검찰은 "피해자를 흉기로 무참히 살해해 죄질이 극히 불량하다"며 우리 사회와 A씨를 단절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A씨 측은 "우발적 범행이었고 자수한 점, 건강 관리가 필요한 점 등을 고려해 선처해 달라"고 호소했다.
재판 과정에서는 A씨가 자녀들에게 "아버지 처벌을 원치 않는다는 내용의 탄원서를 써달라"고 요청한 사실이 드러나기도 했다. 하지만 자녀들은 A씨 요청을 거절했다. 법정에는 A씨와 현지에서 교류하던 일부 필리핀 교민들이 작성한 탄원서만 제출됐다.
결심 공판 한 달 뒤 1심 재판부는 "사람의 생명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중대한 법익"이라며 징역 18년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생명을 박탈한 범죄는 그 행위를 돌이킬 수 없다는 점에서 엄벌이 필요하다"면서도 "우발적 범행으로 이뤄진 점을 고려했다"고 했다.
검찰은 형량이 가볍다며 항소했고 2심에서도 원심과 같은 징역 30년을 구형했다. 2심 재판에선 자녀 중 1명이 선처를 요구하는 탄원서를 내기도 했다. 이에 대해 A씨는 "살인자 자식이라는 오명을 짊어지게 한 것이 미안하다"고 진술하기도 했다.
항소심 재판부는 범행 동기와 정황 등을 살폈을 때 1심 형량이 합리적이라고 판단해 검찰 항소를 기각했다. 이후 양측 모두 상고를 제기하지 않으면서 형이 그대로 확정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