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호(54), 김병현(47)의 성공을 시작으로 2000년대 초반 한국 야구를 강타했던 아메리칸드림에는 명과 암이 있었다. 한국 야구를 세계 무대에 알리고 수준과 눈높이를 높인 것이 밝은 면이라면, 빅리그를 밟지 못하고 돌아온 수십 명의 초고교급 선수들은 어두운 면이었다.
2000년대 초반 미국으로 향했던 한 야구인은 스타뉴스에 "내가 미국으로 갔을 때는 마이너리그가 어떤 곳인지 이야기해줄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집도 차도 다 내가 구해야 했고, 하루에 18시간씩 버스를 타면서 경기해야 했다"고 돌아봤다. 이어 "언어 장벽도 있었다. 미국에는 미국인만 있는 것이 아니다. 남미 선수들도 있어 스페인어도 해야 했다. 당시에는 인종 차별도 있었다. 이런 생활적인 부분이 너무 힘드니까 야구에만 집중하긴 어려운 환경이었다"고 덧붙였다.
실제로 고교 졸업 후 미국으로 직행한 선수 중 유의미한 성과를 냈다고 평가받는 건 추신수(44·은퇴)와 최지만(35·울산 웨일즈) 정도다. 그런 추신수와 최지만조차 루키리그부터 트리플A까지 5단계의 마이너리그를 거친 뒤에야 웃을 수 있었다. 그리고 두 사람의 눈물겨운 성공기는 미국 직행을 고민하는 후배 고교 선수들에게 수많은 실패 사례 못지않은 진입 장벽으로 작용했다. 그 결과 1999년 김병현의 데뷔 후 2011년까지 30명이 훌쩍 넘던 직행 사례가 2011년부터 2020년까지 8명으로 급감했다.
하지만 최근 들어 KBO 리그를 거치지 않고 태평양을 건너는 유망주들이 다시 늘고 있다. 지난 24일(한국시간) 미국프로야구 메이저리그(MLB) 필라델피아 필리스와 120만 5000달러(약 18억 원)에 계약한 박찬민까지 최근 5년만 따져도 벌써 13명이다.
변화의 바람이 분 이유로 먼저 향상된 계약 조건이 꼽힌다. 그동안 국내 톱 유망주들이 미국 진출의 기준으로 삼았던 금액은 100만 달러(약 15억 원)다. 몇 년이 될지 모를 미국 생활비와 자신으로 인해 5년간 KBO 지원금을 못 받게 될 후배들을 위한 기부금 등을 생각하면 최소 100만 달러는 받아야 한다는 인식이 있었다.
반대로 MLB 구단들은 그동안 한국 유망주들에게 100만 달러 이상 주는 것을 꺼렸다. 5년 전만 해도 100만 달러는 국제 아마추어 계약 유망주 랭킹 톱30 안에 드는 선수들이 받는 금액이었다. 또한 그들 역시 지난 20년간 한국 유망주들의 실패 사례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선뜻 지갑이 열리지 않았다.
하지만 코로나19를 기점으로 마이너리그 시스템 재정비와 수익 재분배가 이뤄지면서 국제 유망주들에 대한 대우도 크게 좋아졌다. 단적인 예로 국제 아마추어 계약 보너스 풀이 5년 전과 비교해 1티어 기준 643만 1000달러(약 97억 원)에서 803만 4900달러(약 121억 원) 등으로 구간별 최소 100만 달러 이상 증가했다. 덕분에 올해 1월 국제 아마추어 계약 선수들은 50위권 유망주도 100만 달러 이상의 계약금을 챙기게 됐다.
한층 자금 사정이 여유로워지면서 메이저리그 구단들은 한국 유망주에 투자하는 걸 주저하지 않고 있다. 또한 최근 5년간 한국 시장과 KBO 리그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면서 ML 구단 고위 관계자가 한국을 직접 찾는 경우도 늘고 있다. 대표적인 구단이 토론토 블루제이스, 텍사스 레인저스 등으로 이들은 지난해 부사장을 직접 한국에 파견해 선수들을 관찰한 뒤 각각 문서준(19)과 김성준(19)을 데려갔다.
메이저리그 팀들이 개선된 마이너리그 환경과 체계적인 육성 계획을 제시하면서 실패에 대한 부담이 줄어든 것도 이유다. 코로나19가 강타했던 2020~2021년 롭 맨프레드(68) MLB 커미셔너는 160개에 달하던 마이너리그 구단을 120개로 축소했다. 그와 함께 MLB 사무국과 각 구단이 마이너리그팀들을 직접 관리하면서 긴축 경영을 시도해 논란이 됐다.
하지만 줄인 비용을 마이너리그 환경 개선에 재투자하면서 반발은 조금씩 사라졌다. MLB 사무국은 마이너리그 선수들의 연봉을 높이고 주거 지원을 확대하는 한편, 팀과 리그를 재정비하면서 이동 거리를 줄였다. MLB 구단들은 직접 산하 마이너리그 시설과 식단을 개선하면서 추신수, 최지만 시절 눈물 젖은 빵은 옛말이 되고 있다.
유망주의 3년, 5년 후까지 생각한 체계적인 육성 계획도 어린 유망주들의 마음을 흔들었다. 지난해 텍사스와 계약을 맺은 투·타 겸업 유망주 김성준도 맞춤형 청사진에 미국 도전에 나선 사례다. 텍사스는 투·타 겸업을 향한 김성준의 열망을 확인하고 오타니 쇼헤이(32·LA 다저스)의 성장 과정을 토대로 훈련 스케줄과 계획을 제시했다. 아직 육체적 성장이 끝나지 않은 점을 이유로 투·타를 병행하면서도 투구 수 제한과 엄격한 휴식 간격을 둔 것이 대표적이다.
김성준 관계자는 "텍사스에서는 앞으로 2년 동안은 절대 과하게 운동시키지 않겠다고 했다. 하루는 투수 훈련, 이틀은 타격 훈련을 하고 3일은 쉬는 식으로 철저히 스케줄에 따라 움직이고 있다"고 설명했다.
야구에만 집중할 수 있는 환경도 마련했다. 김성준 관계자는 "매일 영어 선생님과 통역을 붙여준 덕분에 빠르게 영어 실력이 늘고 있다. 다행히 친구들과도 잘 지내서 텍사스 관계자가 이렇게 적응하는 선수는 처음 본다고 한다"고 말했다. 이어 "현재 머무는 텍사스 루키리그 시설이 지은 지 3년밖에 되지 않았다. 여기뿐 아니라 샌디에이고, LA 다저스 등 다른 애리조나 쪽 시설도 다녀왔는데 다 새로 지었다. 메이저리그에 못지않은 시설이라 선수도 만족하고 있다"라고 귀띔했다.
이러한 변화를 최신 MLB 트렌드를 방 안에서 접하고 직접 훈련에 적용하는 국내 어린 선수들이 모를 리 없다. 좋은 지도자가 있다는 이유만으로, 야구를 더 잘하고 싶은 마음에 6개월 전학 페널티를 감수하고 학교를 옮기는 것이 2026년 아마야구의 풍경이다.
물론 미국행에는 여전히 부담이 따른다. 외국 프로구단과 계약한 선수는 계약 종료 후 2년간 KBO 소속 구단과 선수 계약을 맺을 수 없다. KBO 규약 제107조 '외국 진출선수에 대한 특례'에 따른 이른바 2년 페널티다. 그러나 MLB가 제안하는 계약 규모가 커지면서 모교 지원금 제한 규정은 사실상 유명무실해졌다. KBO 복귀 제한 역시 예전만큼 미국행을 주저하게 만드는 결정적 장벽으로 받아들여지지는 않는 분위기다.
이렇듯 더 좋은 환경을 찾아 떠나는 아이들에게 언제까지 호통만 칠 수 없다는 자조 섞인 반응이 현장에서 나온다. MLB가 위기를 기회로 만들었던 것처럼, KBO도 유망주들이 야구를 잘하기 위해 가고 싶은 환경을 만들어줘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미국으로 향하는 아이들] 또 다시 미국으로 떠나는 유망주, 한국야구는 무엇을 놓치고 있나
① '5년 새 13명' 다시 시작된 韓 유망주 미국 직행, 이젠 현장도 '막을 이유'가 없다
② "야구 더 잘하고 싶어요" 추신수·최지만만 웃었던 미국 직행, 2년 페널티에도 유망주들은 왜 태평양 건넜나
③ KBO 컴바인·계약금 현실화·2년 유예 폐지…韓 유망주 미국행, 막을 게 아니라 선택의 문제로 만들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