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지난 8월 소비자 물가지수(CPI)가 투자자들을 '쇼크'에 빠뜨렸다. 미국 증시는 폭락하며 '블랙 튜즈데이'(검은 화요일)가 연출됐다.
13일(현지시간) 발표된 미국의 지난 8월 CPI가 충격적으로 다가온 이유는 3가지다.
첫째, 거의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높은 수준이었다는 점이다.
미국의 지난 8월 CPI는 전달 대비 0.1% 올랐다. 이코노미스트들은 전달 대비 0.1% 하락했을 것으로 전망했었다.
인플레이션이 정점을 치고 하향되는 추세라면 전월에 비해 떨어지고 있는 모습을 보여줘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 지난 7월에는 CPI가 전월과 동일하게 유지됐다.
지난 8월 CPI는 1년 전에 비해서는 8.3% 올랐다. 지난 7월 8.5%에 비해서는 낮아졌지만 이코노미스트들이 예상한 8.0~8.1%보다는 높았다.
인플레이션 하락폭이 이처럼 작을 것이라 예상한 전문가들은 거의 없었다. 인플레이션을 비교적 가장 정확하게 예측해온 CPI 스왑시장조차 지난 8월 CPI 상승률을 8.1%로 전망했다.
둘째, 에너지 가격 급락이 인플레이션을 떨어뜨리는 데 역부족이었다는 점이다.
이코노미스트들은 물론 CPI 전망에 투자하는 CPI 스왑시장 트레이더들마저 지난 8월 인플레이션을 실제보다 낮게 예상한 데는 타당한 근거가 있었다.
지난 8월에는 유가가 우크라이나 전쟁 이전 수준에 근접할 만큼 떨어졌고 전쟁과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한 공급망 문제도 거의 해결돼 공급 측면의 인플레이션 요인은 많이 잡혔다는 공감대가 이뤄졌다.
지난 8월 한 달간 에너지 가격은 전월비 5% 하락했다. 에너지 중에서 특히 휘발유 가격은 10.6% 급락했다.
하지만 월스트리트 저널(WSJ)은 이날 사설을 통해 "에너지 가격 하락이 거의 모든 부문의 물가 상승세를 상쇄하기에 충분치 않았다"고 지적했다.
CPI의 거의 3분의 1을 차지하는 임대료가 전월비 0.7% 상승하고 식료품 가격이 0.8% 급등한 것이 타격이 컸다. 의료 서비스 가격과 신차 가격도 전월비 0.8%씩 올랐다.
특히 버렌베르크의 이코노미스트인 믹키 레비에 따르면 지난 8월 임대료 상승률은 1983년 이후 최대폭이다.
모간스탠리 글로벌 투자 오피스의 모델 포트폴리오 구축팀장인 마이크 로웬가트는 CNBC에 "지난 8월 CPI는 인플레이션을 떨어뜨리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라는 엄중한 현실을 상기시켰다"고 말했다.
지난 8월 변동성이 큰 식료품과 에너지 가격을 제외한 근원 CPI는 전월비 0.6%, 전년비 6.3% 올랐다. 이코노미스트들의 예상치는 전월비 0.3%, 전년비 6.0% 상승이었다.
이는 인플레이션이 훨씬 더 복잡하고 고질적이며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라는 점을 의미한다.
셋째, 연준(연방준비제도)의 금리 인상이 인플레이션을 끌어내리는 데 거의 효력을 발휘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연준은 금리를 지난 3월에 0.25%포인트 인상한 것을 시작으로 5월에 0.5%포인트, 6월과 7월에 각각 0.75%포인트씩 올렸다. 5개월간 매 FOMC마다 총 2.25%포인트를 인상했다. 과거 어느 때보다 공격적인 긴축이다.
중앙은행의 금리 인상은 돈의 값을 비싸게 만들어 돈을 덜 쓰게 만드는 것이 목적이다. 상품이나 서비스를 구매하는 데 돈을 덜 쓰면 수요가 주니 물가 상승 압력이 낮아지고 향후 인플레이션 기대치도 떨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난 8월 CPI는 연준의 긴축이 수요를 관리하는데 지금까지는 실패했음을 보여준다. 단적인 예로 지난 8월 외식비는 전월비 0.9%, 전년비 8% 올랐다. 이는 인플레이션으로 가처분 소득이 줄었어도 외식비에 쓸 돈은 여유가 있어 외식 수요가 최소한 줄지는 않고 있음을 의미한다.
지난 8월 CPI 쇼크로 13일 화요일에 미국 증시는 2020년 6월 이후 2년 3개월 만에 최대 낙폭을 기록했다.
다우존스지수는 3.94%, S&P500지수는 4.32% 급락했다. S&P500 기업 중 단 5개 종목만 올랐다. 나스닥지수는 5.16% 폭락했다. 그야말로 블랙 튜즈데이(Black Tuesday)였다.
문제는 인플레이션을 통제하기 어렵게 만드는 전세계적인 메가트렌드가 계속되는 가운데 미국 바이든 행정부의 정책들이 인플레이션을 더 부추기고 있다는 점이다.
2020년부터 21년까지 미국 재무부 경제정책 수석 고문으로 일했던 앰버웨이브 파트너스의 공동 창업자인 스티븐 미란은 이날 투자 전문 매체인 배런스에 '저 변동성 시대여, 굿바이(안녕)'라는 글을 게재했다.
그는 이 글에서 지난 8월26일 잭슨홀 심포지엄에서 가장 큰 주목을 받았던 인물은 제롬 파월 연준 의장이었지만 가장 중요했던 내용은 아구스틴 카르스텐스 BIS(국제결제은행) 사무총장의 연설이었다고 주장했다.
카르스텐스 사무총장이 잭슨홀 심포지엄에서 전달한 핵심 메시지는 탈세계화와 지정학적 갈등, 인구구조의 변화라는 새로운 메가트렌드로 중앙은행이 혼자 힘으로 인플레이션을 억제하기는 어렵게 됐다는 것이었다.
이 3가지 메가트렌드는 모두 통화정책으로 다스리기 어려운 공급 측면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탈세계화와 지정학적 갈등은 세계 어느 나라든 비용이 가장 적게 드는 곳에서 제품을 생산하는 이점을 누리지 못하게 만든다. 고령화와 출산율 저하라는 인구구조의 변화는 노동력 공급을 제한해 인건비를 끌어올리는 요인이 된다.
이에 대한 해법으로 카르스텐스 사무총장은 3가지를 제시했다. 우선 중앙은행들은 금리 인상을 통해 수요 측면에서 인플레이션을 관리하려는 노력을 계속해야 한다는 점이다.
둘째, 정부는 재정을 수요 확대에 쓰지 말고 공급 위축을 해결하는 데 써야 한다는 점이다. 자금을 지원해 시중 유동성을 늘리는 재정지출은 줄여야 한다는 의미다.
마지막으로 무역 보호주의와 돈을 뿌려 수요를 늘리는 포퓰리즘 정책을 타개하기 위해 전세계가 공조해야 한다는 점이다.
하지만 바이든 행정부는 학자금 대출을 탕감해주고 반 독점법의 강력한 시행으로 빅테크 기업들이 경제와 사회에서 수행하는 순기능조차 제한하고 있다는 게 미란의 비판이다.
아울러 서방 세계와 중국 및 러시아와의 긴장이 고조되며 자유무역은 위협받고 있다. 이는 미국이 고성능 AI(인공지능) 반도체의 중국 및 러시아 수출을 막는 등 자국 우선주의 정책을 강화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기업들은 코로나 팬데믹과 지정학적 갈등을 겪으며 러시아와 중국에 있는 자사 생산시설은 언제든 가동이 중단되고 상품 판매도 제약을 받을 수 있다는 점을 알게 됐다.
미란은 이 결과 1990년 초부터 2010년대 말까지 경제와 주식시장의 장기 호황을 이끌었던 저 변동성의 시대는 막을 내렸다고 주장했다.
그는 2020년 코로나 팬데믹 이후 나타난 새로운 메가트렌드가 투자자들에게 의미하는 것은 2가지라고 지적했다. 첫째는 미국 내에 생산시설과 공급망을 확보해 지정학적 갈등 등 대외 변수에 덜 노출된 기업이 해외 의존도가 높은 기업보다 더 높은 주가 수익률을 보일 것이란 점이다.
둘째는 연준의 노력만으로 인플레이션을 해결하지 못하는 만큼 2010년대 말까지 30년 가까이 이어졌던 저 변동성의 장기 호황에 대한 기억은 잊어야 한다는 점이다.
환경은 이전과 달라졌는데 정책 당국자들은 이전과 같은 정책으로 과잉 대응하면서 경기 사이클이 단축돼 자산시장이 단기간에 급등락을 반복하게 될 것이란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