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보다 귀해진 미국의 전기는 지금 월스트리트가 가장 치열하게 들여다보는 화두다. 미국의 경제성장을 이끌고 있는 인공지능(AI)이라는 거대한 괴물은 돈보다 전기를 먹고 자란다. 챗GPT가 질문 하나를 처리하는 데 드는 전력은 구글 검색의 10배다. 하지만 미국의 전력망은 100년 전 에디슨과 테슬라 시대의 유물이다. 낡고 느리고 꽉 막혔다. 전력 회사에 송전망을 요청하면 "5년 뒤에나 가능하다"는 답변이 돌아온다.
한국처럼 질좋고 저렴한 전기를 쉽게 구하기 어려운 게 미국이다. "엔비디아의 GPU를 사서 데이터센터를 지었다. 그런데 전기는 어디서 구하나"라는 말이 나온 이유다. 오죽하면 밤잠을 설친 젠슨 황 엔비디아 CEO가 "전기공급 우려가 없는 AI공장을 직접 만들겠다"고 할 정도였다.
이런 상황에서 "전봇대나 전선도 필요없다. 전화만 하면 그 자리에 즉시 전기를 공급해 줄 수 있다"는 아이템으로 최근 매달 주가가 2배씩 오르는 기업이 있다. 인도의 천재 과학자 KR 슈리다르(KR Sridhar) 박사가 세운 블룸에너지다.
슈리다르는 1960년, 인도 남부 타밀나두주에서 태어났다. 인도에서 기계공학 학사를 딴 후 미국으로 넘어가 일리노이 대학교 어배너-샴페인(UIUC) 대학원에서 원자력 공학 석사와 기계공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애리조나 대학교 우주 기술 연구소장, 항공우주 및 기계공학 교수로도 재직했다. 슈리다르는 2000년 포춘지로부터 인류 진보를 실제로 이끈 다섯 명의 젊은 혁신가로 꼽혔고, 2009년에는 타임지에서 인생을 바꿀 기술 개척자 중 한명으로 선정될 정도로 천재성을 인정받았다.
나사(미국 항공우주국)에서 실력을 인정받은 슈리다르는 화성탐사 프로젝트에도 참여해 엄청난 미션을 수행했다. 바로 화성 거주자가 호흡기 없이 살 수 있도록 산소를 만드는 것이었다. 화성의 흙과 태양광 전기를 이용해 산소를 배출하는 장치를 만드라는 게 나사의 주문이었다. 연구는 계속됐지만 2001년 미국 9.11 테러가 발생하는 등 우주탐사가 지지부진한 상황이 연출됐다.
고민에 빠진 그는 어느날 기발한 아이디어를 떠올린다. 전기를 활용해 산소와 수소를 만들라는 나사의 주문을 꺼꾸로 하는 것이었다. 화성에서 인간을 살리려던 기술이, 지구의 에너지 문제를 해결할 열쇠가 된 순간이다.
슈리다르가 완성한 아이디어는 고체산화물 연료전지(SOFC)다. 이름은 어렵지만 원리는 단순하다. 박스 왼편에 수소를 넣고, 오른쪽에는 산소를 넣는다. 둘 사이는 특수한 세라믹 막(전해질)이 가로막고 있다. 수소와 산소는 자석처럼 서로 붙으려는 특성이 있다. 시간이 지나면 산소가 세라믹 막을 통과해 수소와 격렬하게 반응하는데 이 과정에서 전자가 튕겨져 나온다. 전선으로 길을 만들어 주면 전자를 모으면 전기가 된다.
이런 화학반응은 슈리다르가 고안한 블룸박스에서 이뤄진다. 수소 대신 도시가스 배관을 통해 들어오는 천연가스도 수소를 함유하고 있기 때문에 이런 반응을 일으킬 수 있다.
기존 발전소는 '천연가스→연소→터빈가동→전기생산'의 구조인데 블룸박스는 '천연가스(수소)→고온에서 세라믹막 투과→전기생산'의 단순한 구조다. 화학반응만 발생하기 때문에 조용하고 에너지 손실이 적어 생산효율이 화력발전에 비해 압도적으로 높다.
슈리다르의 기술은 혁신적이었지만 이를 현실화할 자본이 없었다. 실리콘밸리의 벤처캐피털(VC)을 찾아다녔지만 허무맹랑한 소리라며 사기꾼 취급을 당하기 일수였다. 낙담한 그에게 처음 손을 내민 사람은 존 도어(John Doerr). 구글과 아마존을 키워낸 '벤처 투자의 황제'였다. 존 도어가 일하고 있던 투자사 클라이너 퍼킨스(Kleiner Perkins)는 블룸에너지의 첫 번째 투자자가 됐다. 이렇게 2001년 블룸에너지의 전신인 이온 아메리카(Ion America)가 탄생했다.
블룸박스는 혁신적이고 여러 장점이 있다. 천연가스와 공기 중 산소만 공급해주면 전기가 발생하니 현존하는 연료전지 기술 중 효율이 가장 높다. 천연가스를 태우는 방식의 기존 화력발전은 에너지 생산효율이 30~40% 수준이지만, 블룸박스의 SOFC는 전기 변환 효율이 60% 이상이다. 같은 가스를 써도 전기를 훨씬 많이 뽑아낸다는 뜻이다.
치명적인 약점이 많은 태양광, 풍력과 달리 1년 365일 24시간 일정하게 전기를 만든다. 정전이 용납되지 않는 데이터센터, 병원, 반도체 공장에 최적이다. 태풍으로 미국 전력망이 끊겨도 블룸박스는 독립적으로 돌아간다. 규모도 작다. 주차칸 3대 넓이의 블룸박스가 건물 하나에 필요한 전기를 만든다. 앞마당이나 건물 옥상, 주차장에 설치하면 끝이다. 화력발전보다 이산화탄소도 적고 수소만 쓰면 무탄소 발전도 가능하다.
몇년이 소요될지 모르는 송전탑 건설과 전선망 연결을 기다릴 필요 없이 가스관만 있으면 집에도 곧바로 설치가 가능하다. 막대한 전기가 즉각 필요한 AI 기업들이 블룸에너지의 번호표를 들고 대기하는 이유다. 지금은 천연가스나 바이오가스를 쓰지만, 수소시대가 도래하면 부품교체 없이 수소를 바로 연료로 쓸 수 있다. 확장성도 뛰어나다. 레고 블록처럼 전기가 더 필요하면 블룸박스를 옆에 더 가져다 붙이면 된다. 수백MW까지 마음대로 용량을 조절할 수 있다.
그렇다면 왜 원자력 발전소를 다 없애고, 가정집마다 이걸 설치하지 않을까. 블룸박스도 명확한 한계와 리스크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우선 너무 뜨겁다. 블룸박스의 고체산화물 연료전지SOFC가 작동하려면 700~1000℃까지 올라야 한다.
용광로 수준이다. 가정집에 설치하기엔 위험하고, 무엇보다 '껐다켰다'가 불가능하다. 한번 끄면 다시 온도를 올리는 데 며칠이 걸린다. 그래서 24시간 전기를 일정하게 쓰는 데이터센터나 공장에는 최고지만, 일반 가정용으로는 부적합하다.
전력정책을 정하는 국가입장에서 블룸박스는 화력발전보다는 싸지만 원자력 발전에 비하면 단가가 너무 높다. 블룸박스에는 천연가스를 넣는데, 가스비가 오르면 전기료도 뛴다. 즉 블룸박스는 '전 국민을 위한 값싼 전기'가 아니다. 비용을 좀 더 치르더라도 정전이 절대 안 되고 지금 당장 전기가 급한 구글, 아마존 같은 기업들을 위한 프리미엄 옵션이다.
슈리다르 블룸 에너지 CEO는 블룸박스의 경쟁력을 '속도'라고 말한다. AI 데이터센터는 24시간 미친 듯이 전기를 먹어치운다. 그런데 데이터 센터가 하나 생기려면 송전탑 하나 세우는 데 5년, 10년이 걸린다. AI 기술은 6개월마다 진화하는데, 전기는 10년 뒤에 준다면 사업을 하지 말라는 소리다.
블룸에너지가 제시하는 해결책은 90일이다. 가스관만 있으면, 90일 안에 발전소를 지어준다. 송전탑도, 변전소도 필요 없다. 데이터센터 주차장에 '블룸 박스'를 설치하면 끝이다. 구글, 이베이, 월마트, 아마존, 인텔, 에퀴닉스 같은 거대 기업들이 전력 회사 대신 블룸을 선택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