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기술계 소통 분침이 '5분'에 맞춰지고 있다.
젊은 과학도들의 유명 과학기술 발표 경연대회 '페임랩'은 대중 앞에서 자신이 말할 과학 주제를 5분 이내 모두 전달해야 한다. 하물며 인간과 기계 간의 소통에서도 이 룰은 그대로 적용된다. 지난해 6월, 64년 만에 최초로 인공지능 판별 시험을 통과한 러시아 수퍼컴퓨터 '유진 구스트만'이 평가자(인간)와의 채팅과정에서 자신을 사람이라고 믿게 만드는 데 걸린 시간은 단 5분이었다.
5분은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 졸업식이 한창인 지난 13일 이화여대 이화캔퍼스복합단지(ECC) 국제회의실에선 5분을 두고 분초를 다투는 학술대회가 열려 주목을 이끌었다.
디자인융복합학회가 주최한 '2015 실험적융합학술제'는 참여 학생들에게 독특한 미션을 내렸다. '어떤 수를 동원하더라도 5분 이내 발표를 끝내라'는 것.
계단식 강의실에는 미처 준비가 덜 된 학생들이 장황한 논문 발표용 프리젠테이션(PPT)을 성가신 표정으로 가위질 하는 모습이 간간이 보였다.
여운승 실험적융합학술제 학회장(이화여대 디지털미디어학부 교수)은 "기존에는 15분 정도 발표하고, 다른 주제로 발표가 이어지는 단절된 구조였다면, 이번 학술제에선 '인간과 건강', '도시와 정보' 등 각 그룹별로 나눠 발표자가 5분 이내 자신의 논문을 발표하고, 나머지 시간은 '발표자-청중'이 함께 토론을 진행하는 형태로 바꿨다"고 말했다.
이날 행사에선 '서울 강남역 광역버스 정류장 서비스 개선 제안-HCI 방법론 중심' 등 지난 1년간 학회 학술저널에 수록된 논문 20편이 소개됐다.
모두가 머리를 맞대고 함께 공감하며, 누구나 발언할 수 있는 열린 공간을 제공한다는 차원에서 기획됐지만, 취지대로 행사가 진행되지는 않았다.
'치매자가진단을 위한 태블릿PC용 애플리케이션 설계 연구'를 발표한 유능화 씨(서울상상나라 학예연구실)는 "앞에 계신 분들 보니 5분에 맞추다보니 말이 빨라진 것 같다. 저는 천천히 숨을 쉬면서 해보겠다"며 강단에 올라 겨우 5분을 맞췄다. 하지만 연구 기획 정도를 전달하는 수준에서 그쳤다.
참여한 다른 학부생 및 석·박사급 학생들도 이전과 다른 스타일의 학술행사에 다소 긴장된 모습이 역력했다.
PPT가 1초에 2장씩 넘어가는 빠른 전개는 눈을 어지럽게 했다. 수십여장의 PPT를 제한된 시간에 모두 보여주려는 마음이 앞선 나머지 마우스를 누르는 손이 입보다 더 바빴다.
"러프한 내용입니다만…" 등의 어색한 외래어와 생소한 전문용어가 섞여 무슨 말인지 좀처럼 이해하기 힘든 발표들도 있었다.
'인간과 건강' 세션 좌장을 맡아 첫 토론의 사회자로 나선 국민대 연명흠 교수는 진땀을 빼야 했다. 연 교수는 "5개 논문을 모두 듣고 논의한다는 게 쉽지는 않은 것 같다"며 짧은 감상평을 남긴 후 토론을 진행했다.
세션 안에서는 서로 유사하면서도 이질적인 의견과 주장이 대립될 수 있는 키워드가 공존했다. 이는 발표자와 청중 간 토론이 순탄하게 진행될 것이란 기대를 갖게 했다.
하지만 이마저 시간이 흐를수록 딱딱한 분위기만 연출될 뿐이었다. 연 교수는 "대화내용을 여기 계신 분들이 잘 이해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며 거듭 당부했지만, 책상의자에 반쯤 걸터 앉은 학생들은 지루한 표정 일색이었다. 패널들이 미리 준비한 질문소스가 다 떨어지면 무거운 침묵이 흐르기 일쑤였다. 1부 세션이 끝나자 객석 자리의 3분의 1 정도가 텅 비워졌다.
이날 학술제의 성공 여부에 대해서는 다소 회의적인 시각이 많았다. 하지만 이날 특강을 위해 행사장을 찾은 최재천 국립생태원장은 "아직 익숙하지 않겠지만, 이런 형태의 자리가 계속 마련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최 원장은 "우리가 추구하는 융·복합 연구는 남의 분야까지 이해할 수 있는 소양을 갖춘 '통섭형 인재'가 하는 것"이라며 "자신의 논문을 멋스럽게 발표하기 보단 같은 눈높이로 다양한 사람들이 만나 창발 효과를 이뤄내는 과정을 몸에 익히도록 일깨워주는 게 더 중요하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