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상영된 모든 영화를 손가락 마디만한 작은 USB 메모리카드 하나에 담을 수 있을까.
이를 가능케 할 원천기술을 기초과학연구원(IBS) 양자나노과학연구단 안드레아스 하인리히 단장(이화여대 물리학과 교수)팀이 개발했다.
IBS는 희토류 원소중 하나인 홀뮴(Ho) 원자 1개로 1비트(디지털 신호 최소 단위)를 안정적으로 읽고 쓰는 데 성공했다고 9일 밝혔다.
현재 실리콘 소재를 활용한 전자소자의 발전은 사실상 한계에 다다랐다. 글로벌 반도체 업체인 인텔과 삼성전자는 현재 기술로는 선폭 5나노미터(1㎚는 10억분의1m)를 최소 소자의 한계로 보고 있다. 지난해 인텔은 제조공정 5nm 이하급의 소자소형화를 더 이상 추진하지 않기로 했다. 트랜지스터 소형화기술 한계와 발열 문제 등으로 반도체 집적도가 2년마다 2배로 증가한다는 ‘무어의 법칙’에 제동이 걸린 것이다.
하지만 이 한계를 넘어설 방법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다. 현재 상용화된 메모리는 1비트 구현에 약 십만 개의 원자가 필요한 데 이를 원자 하나 단위로 줄이면 돌파구를 찾을 수 있다.
연구진은 이 같은 시도를 하기 위해 미국 IBM 알마덴 연구소의 주사터널링현미경(STM)을 이용했다. STM은 원자 한 개를 옮길 수 있는 미세한 탐침을 갖고 있으며, 원자 단위 관측이 가능하다.
연구진은 STM으로 2개의 홀뮴 원자와 1개의 철 원자를 배열한 뒤 관찰했다. 홀뮴 원자에 자기변화를 일으켜, 디지털신호를 읽고 쓰는 시도를 한 것이다. 이때 철 원자는 홀뮴의 스핀(원자 외부 자기장)을 읽는 일종의 원격 센서로 활용됐다. 철은 홀뮴의 자기장을 민감하게 감지하는 데 이는 저장된 정보를 읽는 원리와 같다고 보면 된다.
연구진은 또 2개의 홀뮴 원자들은 1나노미터(nm) 정도 간격으로 가까워도 서로 영향을 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찾아냈다. 이 성질을 이용하면 원자를 더욱 촘촘히 배열할 수 있어 저장밀도를 혁신적으로 높일 수 있다는 게 연구진의 설명이다.
연구진은 아울러 한 번 저장된 정보는 수 시간 이상 유지돼 안정성이 높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번 성과는 하인리히 단장이 IBM 재직시절부터 주도했으며, 사실상 이보다 작은 저장단위는 이론적으로 불가능하다.
하인리히 단장은 “홀뮴 원자들이 근접해도 스핀에 영향을 거의 주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는 데, 그 이유를 규명하고, 이번 실험보다 높은 온도에서 재현, 발열에도 문제가 없도록 하는 것이 다음 목표”라고 말했다. 이번 실험은 1.5K(영하 271.5℃)의 극한 환경에서 진행됐다. 연구진은 8K(절대온도)까지 온도가 올라가도 실험결과에 영향이 없음을 확인했다.
연구진이 이번 연구를 고도화하면 이론적으로만 존재하던 양자컴퓨팅이 현실에서 구현가능해진다. 연구진은 다음 목표로 이번 연구에서 밝혀지지 않은 양자역학적 현상을 규명하겠다고 밝혔다.
단장은 “추가 연구가 이뤄지면 양자컴퓨팅을 위한 큐비트를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큐비트는 1이면서 동시에 0인 상태를 한번에 나타낼 수 있는 단위를 뜻한다. 양자컴퓨터는 0과 1의 이진법인 비트로 연산하는 디지털 컴퓨터와 달리 큐비트 연산을 통해 방대한 데이터를 신속하게 풀어낸다.
이번 연구성과는 국제학술지 '네이처' 9일자 온라인판에 게재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