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2032년까지 9년간 의료·건강 관련 연구개발(R&D) 사업에 1조1628억원을 투입하겠다고 공언했지만 올해 책정된 예산 495억원 중 절반밖에 집행하지 못한 것으로 확인됐다. 제약·바이오 산업 현장에선 정부의 연구개발 투자가 부족하다고 아우성인데, 정작 실제 투자가 예산만큼도 이뤄지지 못한 셈이다. 특별법 신설 등을 통한 장기적이고 안정적인 기술개발 투자가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16일 국회와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복지부는 당초 올해 '한국형 ARPA-H 프로젝트' 예산으로 495억원을 책정했다. 하지만 올해 10월말까지 해당 예산의 현재는 약 270억원만 집행됐다. 올해 편성된 예산안의 54.5%만 실제로 연구개발 기관에 투입된 것이다. 그나마 실집행액은 65억4900만원에 불과했다.
특히 올해 집행 가능한 예산도 당초 계획안 대비 57.6%인 285억원으로 쪼그라들었다. 복지부 관계자는 "한국형 ARPA-H 프로젝트는 예비타당성 조사 면제 사업으로 과학기술정보통신부의 적정성 검토를 받게 됐는데 이 과정에서 첫해 예산이 285억원으로 확정되면서 집행 가능한 예산이 285억원으로 줄었다"고 설명했다.
한국형 ARPA-H 프로젝트는 담대한 도전을 통해 국가 난제를 해결하고 의료·건강 서비스의 혁신적 변화를 가져오는 국민 체감형 연구개발 사업이다. 미국 보건의료 분야 도전·혁신형 연구개발체계인 ARPA-H(Advanced Research Projects Agency for Health)를 본떠 만들었다. 정부는 이 사업에 올해부터 2032년까지 9년간 1조1628억원을 지원하기로 했다. 미래의 팬데믹(감염병 대유행), 초고령화, 필수의료 위기 등 국가 난제를 해결하기 위한 5대 임무로 △보건안보 확립 △미정복질환 극복 △바이오헬스 초격차 기술 확보 △복지·돌봄 개선 △필수의료 혁신을 선정했다.
세부 과제로 정부는 △백신 초장기 비축 기술 개발 △백신 탈집중화 생산시스템 구축 △근감소증 치료 기술 개발 △20~30대를 위한 10종 암 조기 검진 기술개발 △의료난제 극복 우주의학 혁신 의료기술개발 △인공지능(AI) 기반 지역완결형 응급환자 분류·이송시스템 개발 등을 추진하기로 했다.
그런데 시작부터 지원금이 축소되고 사업이 지연된 것이다. 한국형 ARPA-H 프로젝트를 담당하는 한국보건산업진흥원 K-헬스미래추진단 관계자는 "기획상으로는 지난 7월부터 올해 과제가 모두 출발하는 것으로 예산이 편성됐는데 프로젝트 관리자(PM) 선발이 지연되면서 일부 과제가 늦게 출발하게 됐고, 예산 집행도 늦어졌다"고 말했다. 다만 올해 사업 지연으로 모두 집행되지 않은 예산은 내년으로 이월된다는 설명이다.
산업계에선 정부가 철저한 계획 하에 연구개발비를 지원해줘야 한다고 본다. 이승규 한국바이오협회 부회장은 "기업 입장에서 연구개발 예산이 부족하고 투자받기도 어렵다 보니 산업 발전을 위해 공공부문에서 투자를 해줄 필요가 있다"며 "사업 구조가 빨리 안정화 돼 연구개발 예산이 하루빨리 집행됐으면 하는 게 업계의 바람"이라고 말했다.
특별법 신설 등의 제도개선으로 정부 차원의 연구개발이 장기적으로 안정되게 진행되도록 해야 한다는 제언이다. 선경 K-헬스미래추진단장(고려대학교 의과대학 명예교수)은 "미국 ARPA-H 프로젝트는 법적 근거가 있고 조직 자체가 기관(청)으로 출범했는데 우리는 프로젝트 기반으로 출발해 사업의 연속성이나 구성원들의 직업 안정성에 대한 우려가 커 고급 인력 확보도 어렵다"며 "도전혁신형 사업을 위한 법·제도 개선 혹은 특별법 신설을 통한 연구의 장을 확보해달라는 게 각 정부부처 혁신도전 기술개발 사업단장들의 공통된 목소리"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