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벨생리학 수상자 37%가 의사과학자(MD-PhD)라고 합니다. 글로벌 제약사 CTO(최고기술책임자), R&D(연구개발) 총괄책임자가 의사과학자입니다. 우리나라도 이런 비율이 상승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대한민국이 바이오산업을 이끄는 국가가 될 수 있습니다."
남수연 차바이오텍 R&D 총괄사장이 27일 그랜드 조선 제주에서 개최된 '의사과학자 컨퍼런스 2026'에서 이같이 말했다. 남 사장은 내과전문의 출신으로 다국적 제약사 등을 거쳤고, 미국에서 판매 중인 유한양행의 비소세포폐암 신약 '렉라자' 등의 개발을 주도한 전문가다. 그는 신약 개발에서 임상의사의 통찰력이 필수적이며, 한국의 신약 개발과 바이오산업 발전을 위해 의사과학자를 육성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남 사장은 "제약회사에서 일하는 국내 의사들의 수가 150여명에 이르지만 대부분 다국적 제약회사에서 한국지사에 요구하는 임상시험수행을 관리한다"며 "또 대학병원의 임상의사들은 주어진 임상시험 계획서대로 임상시험을 수행하는 '데이터 생산자' 역할을 주로 한다"고 꼬집었다. 이어 "이 때문에 실제로 신약 개발 과정에서 요구되는 초기 발견, 임상개발 전략의 수립, 전임상 및 임상시험 결과에 대한 해석 등에 대한 전문성과 경험이 부족한 실정"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임상적 경험이 기초 연구와 접목되는 신약 개발이라는 미개척분야의 길을 추구하는 의사과학자들이 많아졌으면 하는 바람"이라며 "우리나라도 범국가적인 차원에서 필요한 기초과학지식과 임상전문성을 배양할 수 있는 의과학자 교육과정의 확립과 산학 교류 활성화에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또 "제약산업에 기여할 수 있는 의과학자들이 많아질수록 환자, 의사, 그리고 기업 모두에 가치 창출이 될 수 있는 신약 개발의 성공 확률이 비례적으로 향상될 수 있을 것"이라고 짚었다.
실제 의사과학자는 임상 경험과 과학적 지식을 결합해 신약 개발, 정밀의료, AI(인공지능) 의료 등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수행할 국가 인재로 꼽힌다. 혁신적인 질병 치료법 등을 찾은 사람에게 주는 세계 최고의 상인 노벨생리의학상 수상자 중 40%가량이 의사과학자인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보건산업진흥원에 따르면 최근 10년간(2016~2025년) 노벨생리의학상 수상 10건 중 의사과학자가 포함된 수상은 5건이다.
이에 전문가들은 정부가 의사과학자 육성에 힘을 모아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이날 컨퍼런스에 참석한 강현석 미국 스탠포드 의과대학 교수는 "전문성을 갖고 팀으로 일할 수 있는 의사과학자 생태계를 구축하는 게 제일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를 위해 △임상업무로부터 보호된 연구 시간의 법제도적 보장 △단계별 연구비 △평가 기준 다양화 △해외 공동 임상시험 연구원 교환 프로그램 △연구중심병원에서 공식적 의사과학자 트랙 마련 △시행착오에 대한 관용 등이 필요하다"고 제언했다.
정부뿐 아니라 민간에서의 기금 지원 등이 필요하다는 점이 스위스 사례에서 시사된다. 미리암 타페르누 스위스 의학과학원(SAMS) 의사과학자 양성 책임자는 "스위스 국립과학재단이 의사과학자 프로그램을 위해 1년에 약 10억스위스프랑(약 1조9000억원)을 지원하고 그중 3분의 1이 생물학과 의학을 지원하는 데 사용된다"며 "연방정부, 대학, 대학병원은 초기 경력 연구원도 지원하는데 연구개발 자금의 3분의 2가 민간 부문에서 나온다"고 설명했다. 또 "국가 대회 경쟁을 거쳐 펠로우십을 선발해 자금을 지원하고 민간기관, 대학 등과도 협업한다"며 "스위스 인구는 900만명으로 대한민국보다 5~6배 적은데 매년 1400명의 새 의사를 양성해 교육을 완료하고 신규 졸업생의 약 5%가 의사과학자를 선택하는 것으로 추정된다"고 덧붙였다.
김철호 연구중심병원협의회 회장은 "연구중심병원이 의사과학자의 아이디어가 실제 사업화로 이어질 수 있도록 전주기 지원체계를 구축해야 한다"며 "초기 아이디어 단계부터 기술이전, 창업, 임상실증까지 이어지는 통합 지원 플랫폼을 마련하고, 병원 내 연구조직과 기술사업화 조직 간 유기적 연계를 강화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역설했다. 이어 "대형 R&D 사업과 연계한 임상 기반 실증 환경을 제공하고, 병원 간 협력 네트워크를 통해 데이터와 인프라를 공유하는 개방형 생태계를 조성해야 한다"며 "나아가 규제, 인허가, 투자 연계를 포함한 사업화 지원 기능을 강화함으로써 의사과학자가 연구성과를 산업적 가치로 전환할 수 있는 지속가능한 구조를 구축해야 한다"고 제시했다.
양은배 한국의과전문대학원협회 정책연구원장은 △의사과학자 법적 정의 신설과 육성 예산 확보의 근거 마련 △주당 최소 20시간 이상 연구 시간 의무적 할당 △임상 동료 급여의 80~100% 수준 유지하도록 인건비 구조 혁신 △연구중심병원의 '연구중심 의료법인' 격상 및 연구수익 재투자 허용과 세액 공제 확대 등 조세 특례 △병역법 개정을 통해 의과학 분야 전문연구요원 별도 쿼터 연 최소 100명 이상 보장 △정부 출연금과 민간 기부금을 통합한 '의사과학자 양성 및 지원 기금' 설치 △국가 핵심 의사과학자 등록제 시행으로 재정 인센티브 체계 가동 등을 제안했다.
한편 이날 컨퍼런스에서 박현영 대한민국의학한림원 위원장은 보건복지부가 올해부터 의사과학자상을 시상한다고 밝혔다. 매년 우수 의사과학자 5명을 선정해 20년간 100인을 선정하고 의사과학자 생태계 조성을 위한 네트워크 활성화를 지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