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랫동안 경제난에 시달리다 '한 나라, 두 대통령'이라는 초유의 사태를 맞이한 베네수엘라에서 임시 대통령을 자임한 야권 지도자 후안 과이도 국회의장이 중국·러시아와 물밑 접촉을 시작했다. 정적인 니콜라스 마두로 대통령을 지지하는 나라를 회유해 마두로 대통령을 고립시키겠다는 의도로 보인다. 미국이 과이도 의장을 내세워 마두로 정권에 대한 압박 강도를 높이는 가운데 마두로 대통령은 '내전' 가능성을 위협했다.
16일(현지시간)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에 따르면 과이도 의장은 "우리는 세계 모든 나라와 외교관계를 맺기 위해 노력하고 있으며, 베네수엘라에 대한 최대 투자국인 중국과 러시아도 물론 포함된다"고 말했다. 마두로 대통령을 지지하는 중국, 러시아와 협상을 진행하고 있다는 뜻이다. 과이도 의장은 다만 구체적으로 어떤 형태의 대화가 진행되는지는 밝히지 않았다.
앞서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지날 12일 중국 외교관들이 최근 미국 워싱턴 D.C.에서 과이도 의장 측 대표단과 만나 부채 협상을 벌였다고 보도했다. 과이도 의장이 미국 주재 대사로 보낸 카를로스 알프레도 베치오도 이틀 후 "중국과 러시아에 호혜적이고 투명한 관계를 맺고 싶다는 분명한 메시지를 보냈다"며 "그들도 이를 분명히 이해했을 것"이라고 WSJ의 보도를 확인했다.
중국과 러시아가 과이도 의장 측과 협상을 시작한 배경에는 베네수엘라 정부와 기업으로 받아야 할 수백억 달러의 채무가 있다. 마두로 대통령만 지지하다 자칫 투자금을 회수하지 못하는 상황을 피하기 위한 '플랜 B'라는 것이다. 2007년 베네수엘라와 석유 합작 사업을 시작한 중국은 베네수엘라에 '원유 상환'을 조건으로 지난 10년 동안 약 620억달러의 차관을 제공했다. 중국 상무부는 이 가운데 200억달러를 여전히 회수하지 못한 것으로 추산한다.
러시아도 2006년부터 베네수엘라에 150억달러 이상을 빌려줬으며, 32억달러 규모의 베네수엘라 국채도 보유한다. 러시아 석유 회사 로즈네프트는 지난 5일 지난해 실적 발표회에서 베네수엘라 국영 석유회사 PDVSA가 지난해 23억달러의 채무를 갚았으나, 여전히 원금만 23억달러에 이르는 채무를 지고 있다고 했다. 러시아의 한 고위관료는 FT에 "과이도 의장 측과 직접적인 대화를 하지는 않았지만, 미국 쪽 인물을 통해 접촉하고 있다"면서 "직접적인 대화가 필요하지만, 만약 마두로가 권력을 잃을 정도로 약해진다면, 그대로 놔둘 것"이라고 했다.
과이도 의장은 현재 미국과 유럽 등 서방 50여 개 나라로부터 지지를 받고 있다. 특히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는 마두로 정권에 대한 압박을 강화하며 과이도 의장을 적극 지원하고 있다. 지난 15일에도 미 재무부가 베네수엘라 국영 석유회사인 PDVSA의 마누엘 케베도 사장을 포함해 마두로 정권 핵심 인사 5명의 미국 내 자산을 동결했다. 존 볼턴 미국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 보좌관도 자신의 트위터를 통해 "마누엘 케베도 PDVSA 사장이 미국의 제대 대상이 됐다"며 "국제적인 석유 회사들에 그와 거래하는 위험을 감수하지 말라"고 강조했다.
과이도 의장과 마두로 대통령의 대립은 오는 23일 절정에 이를 것으로 보인다. 과이도 의장이 미국이 보낸 식료품과 의약품 등의 인도적 지원품을 브라질, 콜롬비아 등으로부터 들여올 예정이기 때문이다. 과이도 의장은 이를 통해 경제난을 해결하고 마두로 정권에 대한 민심 이반과 군부 이탈을 노리고 있다. 이에 대해 마두로 정권은 각종 제재로 베네수엘라에 경제적 고통을 준 미국이 얼마 안 되는 원조로 생색을 내는 것은 '정치 쇼'라며 국경을 잇는 다리를 봉쇄하는 등 반발하고 있다. 특히 마두로 대통령은 미국의 원조가 침공을 위한 빌미가 될 것이라며 미국에 "(베네수엘라를) '제2의 베트남'으로 만들지 말라"고 위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