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최장수 총리가 된 아베 신조의 외교 정책은 단순했다. 미국에는 비굴하게 보일 정도로 밀착하면서, 중국과 러시아 등 주변 강국과도 원만한 관계를 유지했다. 심지어 북한 김정은 정권에까지 구애하며 관계개선을 시도했다. 그러나 한국과의 외교에서는 거침이 없었다. 한국 대법원의 강제징용 판결을 빌미로 수출규제를 가하면서 양국 관계가 최악으로 치달았지만 물러서지 않았다.
아베 정부의 외교정책은 첫째도 미국, 둘째도 미국이었다. 원래 일본 외교는 미국이 최우선이었지만, 아베 시대 들어서는 정도가 심해졌다. 특히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 취임 이후 아베 총리가 보인 행보는 일본 내에서조차 '굴욕적'이라는 비판이 나올 정도였다. 아베 총리는 그동안 트럼프 대통령과 13번 만났으며, 전화로는 적어도 31회 이야기를 나눴다. 두 사람이 함께 골프를 친 회수도 5회에 달한다.
'브로맨스(bromance·남자들 간의 우정)'라 불릴 정도인 아베 총리와 트럼프 대통령의 친밀한 관계는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과도 대비된다. 아베 총리와 오바마 전 대통령은 4년이나 재임 기간이 겹쳤지만, 회담과 전화통화가 각각 9회, 10회에 그쳤다. 오바마 전 대통령은 골프광이라 불릴 정도로 골프를 좋아했지만, 아베 총리와 골프를 함께 치지는 않았다.
아베 총리의 구애에 트럼프 대통령도 적극 회답했다. 지난 5월 일본에서 새 연호인 레이와(令和)가 사용된 이후 첫 국빈으로 일본을 방문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3박4일간의 방일 기간 중 아베 총리와 골프를 치고, 스모 경기를 관전하는 등 친밀한 관계를 연출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한 달 뒤 일본 오사카에서 열린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 참석차 또 일본을 찾았다. 미국 정상이 한 달 사이 한 나라를 연속으로 국빈 방문한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트럼프 대통령은 아베 총리와의 친분을 이용해 철저히 실리를 챙겼다. 지난해 일본이 주도하는 거대 경제권 구상인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에서 탈퇴했으며, 지난달 미일 무역협정을 체결하면서 일본 농산물 시장의 문을 대폭 열어젖혔다. 특히 미국의 일본산 자동차 관세 인하 방안은 협정에서 쏙 빠졌지만 일본은 미국산 옥수수를 250만t이나 수입해야 해 "과도한 퍼주기'라는 비판이 나왔다.
미국은 일본과의 방위비 협상에서도 양보 없이 거액의 분담금 증액을 요구했다. 미 외교전문매체 포린폴리시는 트럼프 행정부가 일본에 요구한 연간 방위비 분담금은 현재보다 4배 많은 80억달러(약 9조3256억원)에 이른다고 전했다. 미일 방위비 분담금 협정은 오는 2021년 3월 종료되며, 새로운 협상은 내년에 시작된다. 현재 5만4000명의 미군이 일본에 주둔하고 있다.
아베 총리는 중국, 러시아에도 먼저 손을 내밀며 관계개선에 힘쓰고 있다. 일본은 중국, 러시아와 각각 센카쿠열도(댜오위다오), 쿠릴열도를 놓고 영토 분쟁 중이지만 갈등보다는 협력에 중점을 둔 모습이다. 아베 총리는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지난 6월 G20 정상회의 참석차 일본을 방문했을 때 "내년 벚꽃 필 때 또 오시라"며 국빈방문을 요청했다. 시 주석은 취임이후 한 번도 일본을 국빈방문하지 않았다. 오히려 중국 측 배가 센카쿠열도에 접근하는 횟수가 증가하는 등 영유권 분쟁 가능성은 더욱 커졌다.
아베 총리는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과도 27번 넘게 만나며 러일 관계개선에 공을 들였다. 특히 2016년 푸틴 대통령이 일본을 방문했을 때 자신의 고향인 야마구치현 나가토시 온천으로 초대해 극진히 대접했지만, 정작 푸틴 대통령의 반응은 신통치 않았다. 아베 총리는 줄곧 푸틴에 쿠릴열도 남단 4개섬(일본명 북방영토) 반환과 평화협정 체결을 요구했지만, 푸틴 대통령은 이를 무시하듯 쿠릴열도에서 대규모 군사훈련을 했다. 중국과 러시아와의 관계에서 눈에 띄는 외교적 성과를 얻지 못한 것이다.
심지어 아베 총리는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에게도 "조건 없이 만나자"고 정상회담을 제의했지만, 북한은 "과거사 반성과 적대 정책 철회 없는 회담은 있을 수 없다"며 거부했다.
아베 정권은 한국과의 관계에서는 유독 강경한 모습을 보였다. 2015년 박근혜 정부 때는 '위안부 합의'를 타결하는 등 우호적인 모습을 보였지만, 문재인 정부 들어 태도가 돌변했다. 문재인 대통령이 위안부 합의의 불합리성을 지적하며 재협상을 요구하고, 한국 대법원에서 일본 기업의 강제징용 피해 보상 판결이 나오자 한국을 거칠게 대하기 시작했다.
일본 정부는 지난 7월 '국가 간 신뢰 손상'이라는 모호한 이유로 한국에 대한 반도체 핵심 소재 수출 규제를 강화했으며, 한국을 수출심사 우대국 목록(화이트리스트)에서도 빼버렸다. 한국 정부가 이에 대한 반발로 박근혜 정부 시절 체결된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지소미아) 파기 카드를 꺼내 들면서 한·미·일 삼각동맹까지 흔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