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 촉발한 미중 패권 경쟁이 사그라들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안보·국방 분야 석학으로 손꼽히는 그레이엄 앨리슨 하버드대 교수는 2017년 출판한 세계적 베스트셀러 '예정된 전쟁'(Destined for War)에서 미중 관계를 '투키디데스의 함정'(Thucydides's Trap)에 빗댄 바 있다.
'투키디데스의 함정'은 신흥강자 아테네와 패권국 스파르타가 충돌한 펠로폰네소스 전쟁처럼 신흥 강대국이 급격히 부상하면 기존 강대국이 불안감을 느끼게 되고 결국 전쟁으로 귀결된다는 의미다. 앨리슨 교수는 지난 500년간 신흥강자가 기존 강대국을 대체하려는 시도가 16번 있었으며 이중 12번이 전쟁으로 귀결됐다고 분석했다.
지난 12월 7일 앨리슨 교수가 작성한 '거대한 기술 경쟁: 21세기의 중국과 미국'이라는 보고서를 하버드대 케네디스쿨 벨퍼센터가 발표했다. 이 보고서는 미국 정권인수팀에 도움을 주기 위해 작성됐으며 2020년 11월 미 대선 이후 바이든 진영 수뇌부와 트럼프 행정부에게 전달된 것으로 알려졌다.
보고서는 중국이 21세기 핵심 기술분야인 인공지능(AI), 5G(5세대 이동통신), 양자정보과학(QIS), 반도체, 바이오, 녹색에너지 분야에서 이미 1등이거나 10년 안에 미국을 따라잡을 것으로 예상했다.
20년 전만 해도 미국은 중국이 이렇게 성장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은 2000년 이후를 예상한 특별판에서 "중국의 인구는 너무 많고 국내총생산은 너무 작기 때문에 중국이 21세기에 거대 산업국가로 성장하지 못할 것"이라고 예측한 바 있다.
하지만 2020년 중국은 약 2억5000만대의 컴퓨터, 2500만대의 자동차 및 15억대의 스마트폰을 제조하며 미국을 제치고 글로벌 최대 하이테크 제품 생산기지로 성장했다.
중국이 가장 앞서고 있는 분야는 바로 인공지능(AI)이다. 음성인식 관련 분야에서 중국기업은 영어를 포함한 모든 언어에서 미국기업보다 뛰어난 성과를 보이고 있다. 중국 최대 음성인식 업체 아이플라이텍의 사용자 수는 7억명으로 애플의 음성인식 서비스 '시리'(Siri) 사용자 수의 두 배가 넘는다.
핀테크 분야에서도 텐센트가 운영하는 위챗페이 사용자수는 9억명으로 애플페이 사용자 수 4400만명을 압도한다. 게다가 3분의 2가 신용카드만 사용하는 미국과 달리 중국은 도시인구의 90%가 모바일 페이를 사용하고 있으며 미국인들이 쓰는 돈의 150배에 달하는 금액을 모바일 플랫폼에서 지출하고 있다. 모바일 결제는 개인소비 패턴 등 '21세기의 원유'로 불리는 데이터를 생산하기 때문에 핀테크 서비스 발전에도 유리하다.
특히 안면인식 분야는 중국의 경쟁력이 독보적이다. 미국이 개인정보 보호와 기술 활용에 대한 우려 때문에 아예 경쟁을 포기한 반면 중국은 주민 통제 수단으로 활용키 위해 안면인식 기술을 적극적으로 개발해왔기 때문이다. 센스타임(SenseTime), 메그비(Megvii) 등 중국 인공지능업체는 단 몇 초 만에 중국인의 신상정보를 14억명 중에서 확인할 수 있는 기술력을 갖췄다.
인공지능, 컴퓨터, 자동차 등 모든 영역에 걸친 미중 기술 경쟁의 가장 핵심적인 분야가 바로 반도체다. 미국이 여전히 글로벌 반도체 산업을 지배하고 있지만, 투자 부족과 해외 경쟁업체의 성장으로 인해 미국의 경쟁우위가 약화된 상태다.
중국의 글로벌 반도체 소비 비중은 2000년 20% 미만에서 2019년 60%로 세 배 넘게 증가했기 때문에, 중국은 안보뿐 아니라 시장 수요를 만족시키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반도체 산업에 진출해야 한다.
중국 반도체 산업의 선봉장 역할을 하고 있는 회사는 바로 화웨이 자회사인 하이실리콘(팹리스)와 SMIC(파운드리)다. 하이실리콘은 2020년 상반기 글로벌 10대 반도체 기업에 중국 기업 최초로 진입했으나 이후 미국 제재로 매출액이 급감하면서 하반기에 순위권 밖으로 밀렸다. SMIC는 올해 3분기 글로벌 파운드리 시장에서 시장 점유율 5%로 5위를 기록하는 등 꾸준히 순위권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
중국이 수입을 통해 반도체 수요의 85%를 만족시키고 있지만 중국 반도체 산업이 계속 지금 상태에 머물 가능성은 낮다. 미국반도체산업협회(SIA)는 2030년까지 중국이 전 세계 신규 생산시설의 40%를 차지하면서 시장 점유율 24%를 달성해, 글로벌 최대 반도체 생산국이 될 것으로 전망했다. 우리나라는 시장점유율이 19%로 낮아지면서 2020년 2위에서 2030년 3위로 하락할 전망이다.
모리스 창 TSMC 창업자는 "중국이 반도체 설계에서 미국과 대만에 단지 1~2년 뒤처졌으며 반도체 제조에서는 TSMC에 5년 뒤처졌다"고 밝힌 바 있다. 격차가 있지만 추격이 불가능한 정도는 아니다. 네덜란드 반도체 장비기업 ASML의 피터 웨닝크 최고경영자 역시 "15년 안에 중국이 반도체 생산을 자립화하고 기술주권을 달성할 수 있을 것"이라고 예측했다.
보고서는 2030년까지 중국이 반도체 업체의 선두그룹에 진입하도록 만들겠다는 시진핑 주석의 목표가 성사될 확률이 높다고 분석했다.
미국과 중국의 총 연구개발(R&D) 투자규모를 보면 중국의 추격이 그대로 드러난다. 2020년 구매력평가지수(PPP) 기준 2000년 미국의 총 R&D 투자는 2700억 달러에 달했지만, 중국의 투자규모는 330억 달러에 불과했다. 하지만 2020년에는 미국(6400억 달러)의 약 90% 수준인 5800억 달러까지 따라왔다.
국제특허 출원건수는 미국을 앞질렀다. 유엔 산하 세계지식재산기구(WIPO)에 따르면 국제특허(PCT) 출원건수는 2019년 중국이 5만8990건으로 미국을 앞지르며 1위를 차지했다. 중국은 5년 동안 PCT 출원건수를 2배 이상 늘리며 일본, 미국을 차례대로 추월했다.
중국의 추격이 무섭지만 보고서는 이 같은 현실이 미국에게 이미 '게임오버'(game over)를 의미하는 건 아니라면서, 중국의 도전 규모를 제대로 인식하는 게 효율적이고 지속적인 대중전략을 고안하는 출발점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우리 역시 새겨들어야 할 대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