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제약업계가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의 약값 인하 정책을 바탕으로 일본에 약값 인상을 요구하고 나섰다. 한국을 비롯한 다른 선진국도 유사한 압박에 직면할 것으로 예상된다.
18일 니혼게이자이신문(닛케이)에 따르면 미국제약협회(PhRMA) 회장이자 미 제약업체 화이자 최고경영자(CEO)인 앨버트 불라는 이날 일본 도쿄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앞으로 미국과 일본 간 신약 가격을 동등하게 만들어야 한다"며 일본의 약값 인상을 촉구했다.
불라 회장은 트럼프 행정부가 추진 중인 '최혜국대우(MFN) 약값 정책'을 거론하며 "우리는 선진국의 약값을 미국 수준에 맞추려는 미 정부의 노력을 지지한다. 모든 국가가 공평하게 비용을 부담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트럼프 행정부는 지난 5월 미국 내 약값 인하를 위해 최혜국(다른 나라보다 불리한 대우를 받지 않음) 약값 정책을 도입하겠다고 발표했다. 미국 의약품 가격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선진국 가운데 최저 수준에 맞춘다는 정책이다. 그는 "미국은 전 세계 인구의 4%에 불과하고 전 세계 처방약의 13%를 소비할 뿐인데, 제약사들은 이익의 75%를 미국 소비자에게서 거둬간다"며 "만성적 불공정"을 해소하겠다고 밝혔다.
이에 화이자를 비롯해 아스트라제네카, 일라이릴리 등 주요 제약사들은 미 정부와 신약을 포함한 일부 품목에 한해 최혜국 약값 인하에 합의했다. 대신 미국의 수입 의약품 관세 부과를 3년 동안 유예받았다. 트럼프 정부는 다른 제약사와도 유사한 합의를 이어갈 전망이다. 그는 지난 7월 17개 글로벌 제약사에 서한을 보내 60일 내로 미국 내 약값을 인하하라고 요구했다.
불라 회장은 "최혜국 약값 정책은 명백히 대부분 기업의 방침에 영향을 줄 것"이라며 "일본 기업도 최종적으로는 트럼프 정권과 합의에 이를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날 불라 회장은 일본에 △특허 유효 기간 중 약값 유지 △혁신 의약품의 적절한 평가 △신약 개발 생태계 재구축을 위한 국가 전략 수립 등을 촉구했다. 그는 전날 다카이치 사나에 일본 총리와 회담한 사실을 밝히며 "총리는 문제를 이해하고 있다"며 "과학에도 일본에도 좋은 형태로 해결책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를 나타냈다.
미국 제약업계의 압박은 일본에 그치지 않을 전망이다. 미국제약협회는 지난 6월27일 미국 무역대표부(USTR)에 제출한 의견서에서 한국을 포함한 9개국과 유럽연합(EU)을 '미국산 의약품 가격을 인위적으로 낮게 책정해 자국 산업에 피해를 주는 국가'로 지목했다. 최혜국 약값 정책의 참조국(1인당 GDP(국내총생산)가 미국 대비 60% 이상인 국가들)이 될 수 있는 선진국을 상대로 가격 인상 압박에 나선 것이다. 공공정책 연구기관 랜드 코퍼레이션에 따르면 한국 약값은 미국의 25.57% 수준이다.
약값 인상뿐 아니라 '의약품 패싱' 현상도 심화할 거란 전망도 나온다. 약값이 낮은 곳에는 신약 출시를 피할 수 있다는 우려다.
데이비드 릭스 일라이릴리 CEO는 지난 15일 닛케이와 인터뷰에서 "낮은 약값을 유지하면 일본에서 팔리는 신약은 확실히 줄어들 것"이라며 "약값을 동등하게 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일본에서 신약을 출시하지 않거나, 전 세계에 신약을 싸게 판매해 미국에서 막대한 경제적 손실을 입는 선택지 중에 선택해야 한다면 대부분 기업은 전자를 택할 것"이라고 했다.
나루세 미치노리 일본총합연구소 수석 연구원은 트럼프의 최혜국 약값 정책으로 "제약회사들이 미국 약값 인하에 따른 손해를 상쇄하기 위해 일본을 비롯해 약값을 엄격히 통제하는 나라를 피하는 움직임이 강해져 신약이 도입되지 않는 '드러그 로스'(drug loss)가 심화할 우려가 있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