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인' 교황도 "전쟁 축복할 수 없어"…성난 트럼프 말폭탄[글로벌키맨]

윤세미 기자
2026.04.13 15:42

[글로벌키맨]트럼프 비판하는 레오 14세 교황

[로마=AP/뉴시스] 교황 레오 14세가 3일(현지 시간) 이탈리아 로마 콜로세움에서 열린 성금요일 ‘십자가의 길’(비아 크루치스) 행렬에 참석해 길이 1.5m의 경량 나무 십자가를 들고 행진하고 있다. 이 행렬은 예수가 예루살렘 갈바리 언덕에서 십자가형을 당하기까지의 길을 상징적으로 재현한 것이다. 2026.04.04. /사진=민경찬

"미국에 큰 영광" 지난해 역사상 첫 미국인 교황 레오 14세가 탄생했을 때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환영 메시지다. 시카고 출신의 로버트 프랜시스 프레보스트 추기경이 성좌에 오르자 워싱턴 안팎에선 미국인 교황의 탄생이 미국의 외교 자산이 될 거란 기대감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즉위 약 1년이 지난 지금 상황은 정반대로 흘러간다. 레오 14세는 침묵을 깨고 트럼프 대통령의 외교 정책을 잇따라 비판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교황 직무에 집중하라며 맹비난했다. 전세계 가톨릭 신도들의 정신적 리더가 트럼프 행정부 외교 기조를 정면 비판하면서 파장이 이어진다.

로이터 등에 따르면 레오14세는 11일(현지시간) 바티칸 성 베드로 대성당 특별 기도회에서 "자기 자신과 돈에 대한 우상 숭배는 이제 그만, 권력 과시도 이제 그만"이라며 "점점 더 예측 불가능하고 공격적으로 변해가는 전능에 대한 망상"에 맞서 기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는 트럼프 대통령을 겨냥한 메시지로 받아들여졌다.

레오14세는 하루 전엔 X(옛 트위터)를 통해 "하느님은 어떤 전쟁도 축복하지 않는다"며 "평화의 왕이신 그리스도의 제자라면 과거에 칼을 들었고 오늘날에는 폭탄을 떨어뜨리는 이들의 편에 서지 않는다"고 썼다. 트럼프 대통령이 "이란 문명 전체를 멸망시키겠다"고 위협했을 땐 "결코 용납할 수 없는 일"이라며 정면 반박했다. 레오14세는 "민간 인프라 공격은 국제법 위반이며,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증오와 파괴의 징표"라고 경고했다.

(바티칸 로이터=뉴스1) 김지완 기자 = 4일(현지시간) 레오 14세 교황이 바티칸 성베드로 광장에서 주간 일반 알현을 진행하며 손을 흔들고 있다. 2026.03.04 ⓒ 로이터=뉴스1 Copyright © 뉴스1.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및 재배포, AI학습 이용 금지. /사진=(바티칸 로이터=뉴스1) 김지완 기자
트럼프 "정치인처럼 하지마"…인신공격까지

그러자 트럼프 대통령이 레오14세를 맹비난하고 나섰다. 트럼프 대통령은 12일(현지시간) 트루스소셜을 통해 "레오는 교황으로서 정신을 차리고 상식을 발휘하며 급진 좌파에 영합하는 걸 멈추고 정치인이 아닌 위대한 교황이 되는 데 집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레오는 범죄 문제에 약하고 외교 정책에도 형편없다"며 "이란의 핵무기 보유를 방치하고, 마약과 범죄자를 수출하는 베네수엘라를 공격한 걸 비판하는 교황을 원치 않는다"고 했다.

아울러 트럼프 대통령은 "레오는 교황 후보 명단에도 없던 깜짝 놀랄 존재였다"며 "내가 백악관에 없었다면 레오도 바티칸에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인신공격적인 발언도 이어갔다. 그는 교황이 급진 좌파 세력에 영합하는 반면 교황의 형 루이 프리보스트는 마가(MAGA) 지지자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레오보다 (MAGA 지지자) 루이가 훨씬 좋다"고 덧붙였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레오 14세 교황을 직격했다,/사진=트루스소셜

반이민·전쟁 갈등 누적…과묵한 관찰자에서 단호한 비판자로

미국 정가와 종교계에선 '레오 14세를 다시봤다'는 평가가 나온다. 즉위 초만 해도 레오 14세는 과묵하고 신중한 인물로 보였다. 그는 "아마도", "제 생각에는" 같은 단서를 붙이며 말을 아꼈다. 진보적이면서 즉흥적 발언도 했던 전임 프란치스코 교황과 달랐다. 중동 갈등이 고조되자 레오 14세는 한층 단호해졌다.

교황이 비인도적 폭력을 비판하고 평화를 촉구하는 것이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레오 14세는 이란 전쟁을 둘러싸고 어느 때보다 더 빈번하고 강하게 트럼프 행정부를 비판하고 있다. 미국과 이스라엘이 2월28일 이란 공습을 시작한 직후인 3월1일, 레오14세는 바티칸 성 베드로 광장에서 열린 주일 삼종기도 후 연설에서 "깊은 우려"를 표하며 "폭력의 악순환"을 멈출 것을 촉구했다.

피트 헤그세스 미 전쟁부(국방부) 장관이 이번 전쟁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수행되는 성전"이라고 묘사했을 때 교황은 "일부는 이런 죽음의 선택을 정당화하면서 신의 이름까지 끌어다 쓴다"며 "그러나 신은 어둠의 편에 설 수는 없다"고 일축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SNS에 올린 이미지/AFPBBNews=뉴스1

1월 레오14세는 외교관 대상 연설에서 "전쟁에 대한 열광이 확산되고 있다"며 "국가가 무력을 사용해 타국의 국경을 침범하는 것을 금지해 온 규범이 완전히 훼손됐다"고 지적했다. 이는 미국의 베네수엘라 군사작전을 비판한 것으로 해석됐다.

이에 엘브리지 콜비 미 전쟁부 정책차관은 미국주재 바티칸대사를 펜타곤으로 불러 "가톨릭교회는 미국 편에 서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경고한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당시 미국 측 인사가 14세기 교황이 프랑스 왕권에 종속됐던 '아비뇽 유수'를 언급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수백년 전 교황이 갈등을 빚던 프랑스 왕실로부터 수모를 겪은 뒤 유폐 당한 사건을 언급한 건 협박 아니냐는 논란이 일었다.

교황청과 트럼프 행정부의 갈등은 전쟁 이전부터 누적돼 왔다. 지난해 레오14세는 수십 년간 미국에서 평화롭게 살아온 이민자들에 대해 "아무리 좋게 말해도 극도로 무례하고, 때로는 폭력까지 동반된 방식으로 대우받고 있다"고 꼬집었다. 교황은 지난해 미국 정부가 이민자 대규모 추방 정책을 강화했을 때 미국 주교들에게 이민자 지원에 적극 나설 것을 독려한 것으로 알려진다.

레오 14세 교황/AFPBBNews=뉴스1
시카고 출생, 페루서 사목한 최초 미국인 교황

트럼프 행정부가 레오 14세의 비판을 가볍게 볼 수 없는 이유는 그가 가톨릭 세계의 수장인데다 미국인이기 때문이다. 미국인의 정서와 정치 메커니즘을 누구보다 잘 아는 교황이 오죽하면 목소리를 내겠냐는 평가는 미국 내 가톨릭 표심을 움직여 트럼프 행정부에 부담이 될 수 있다. 실제로 미국 백인 가톨릭계의 트럼프 지지율은 하락세다.

레오 14세는 1955년 미국 시카고에서 태어났으며 페루 빈민가에서 20년간 사목활동을 했다. 지난해 5월 제267대 교황으로 선출됐다. 가톨릭교회 최초의 미국인 교황이다. 신학적으로는 중도 성향이어서 교화 내 개혁파와 보수파 사이에서 균형을 잡을 인물로 평가된다. 신학과 별개로 펜실베이니아주 빌라노바대에서 수학을 공부하기도 했다. 영어·스페인어·포르투갈어·이탈리아어·프랑스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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