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란 전쟁에 따른 물가압박이 이어지면서 통화 정책을 결정해야 할 각국 중앙은행의 셈법이 분주해졌다. 경제 성장을 위해선 통화 완화 정책을 취해야 하지만 전쟁 탓에 국제유가가 배럴당 100달러 이상으로 치솟는 등 물가상승 압력이 높아지고 있어서다. 인플레이션 상황에서 통화 완화정책은 상황을 더욱 악화시킬 수 있다.
미국 중앙은행 격인 연방준비제도(Fed·연준)는 금리 인하를 압박해 온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요구에도 불구하고 금리 인상 논의에 나섰다. 발빠른 호주중앙은행(RBA)은 올해 들어서만 벌써 세번째 금리인상을 단행했다.
닐 카시카리 미국 미니애폴리스연방준비은행 총재는 지난 3일(현지시간) 한 방송에 출연해 금리 인상 가능성을 시사했다. 그는 "특히 호르무즈 해협이 폐쇄되는 기간이 길어질수록 에너지 및 비료 가격이 상승해 미국 내 인플레이션에 큰 영향을 줄 것"이라며 "최악의 경우 금리를 반대 방향(인상)으로 움직여야 할 수도 있다. 지금 (시장에) 금리 인하 신호를 보내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언급했다.
중동 전쟁이 장기화하면서 휘발윳값 상승 등으로 물가 상승이 이어지자 금리 인상 가능성도 열어두겠다는 취지로 읽힌다. 지난달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는 기준금리를 3.50∼3.75%로 동결했다. 이날 회의에서는 투표권을 가진 12명의 FOMC 위원 가운데 베스 해먹, 닐 카슈카리, 로리 로건 등 3명의 위원이 금리 인하 기조를 성명에 담는 데 반대했다.
카시카리 총재는 앞선 인터뷰에서 "이란 분쟁으로 인한 에너지 가격 효과(상승)는 이미 우크라이나 전쟁 당시보다 크거나 비슷한 수준"이라며 "글로벌 기업들에 따르면 해협이 오늘 당장 열려도 공급망이 정상화되는 데 6개월이 걸린다. 따라서 인플레이션 데이터를 매우 주의 깊게 지켜봐야 한다"고 언급했다. 그는 "연말까지 전쟁이 장기화할 경우 미국 경제의 성장 궤도에 심각한 하향 굴곡을 만들 것"이라고 언급했다. 인플레이션 충격이 커지면 소비 심리가 악화하고, 결과적으로는 경제 성장과 더불어 노동 시장을 악화시킨다는 진단이다.
LPL 파이낸셜의 로렌스 길럼 수석채권전략가는 올해 미국의 금리 인하 가능성이 여전히 존재하긴 하나 이란과의 갈등이 길어질수록 그 확률은 점차 낮아지고 있다고 분석했다. 길럼 전략가는 "차기 연준 의장 지명자인 워시의 앞날에 험난한 여정이 기다리고 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분석했다.
호주 RBA는 지난 5일 기준금리를 4.35%로 0.25%p(포인트) 인상했다. 올해 세 번째 금리 인상으로 지난해 단행했던 세 차례의 금리 인하분을 모두 되돌린 것이다. RBA는 올해 인플레이션 전망치를 5%에 근접하게 대폭 상향 조정했다. 반면 경제 성장 및 고용 전망치는 낮췄다. RBA 이사회는 "높은 연료 가격이 인플레이션을 가중하고 있으며 이것이 상품 및 서비스 가격 전반에 광범위한 2차 파급 효과를 미칠 가능성이 있다"고 밝혔다.
영국도 분위기 변화가 감지된다. 영국은 지난달 30일 통화정책 회의에서 기준금리를 3.75%로 동결했지만 이란 전쟁으로 인한 에너지 충격이 물가 상승을 가속할 경우 금리를 인상해야 할 수도 있음을 시사했다. 목요일 발표된 회의록에 따르면 영란은행의 수석 경제학자인 휴 필은 물가 상승 위험을 완화하기 위한 즉각적인 0.25%p 금리 인상을 지지했다.
시장은 오는 6월 통화정책 결정을 앞둔 유럽중앙은행(ECB)의 금리 인상 가능성도 높게 점치고 있다. 금융시장은 ECB가 6월 회의에서 약 85%의 확률로 금리를 0.25%p 인상할 것으로 예측한다. 코메르츠방크의 라이너 군터만 금리 전략가는 "ECB 소식통들은 에너지 가격이 완화되지 않을 경우 통화 긴축 편향을 보이거나 심지어 두 차례 정도의 금리 인상 가능성을 시사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