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중 패권 경쟁이 심화하는 가운데 개방적·규칙 기반 시장경제 질서를 수호하기 위해서는 유럽연합(EU)과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CPTPP)을 중심으로 독자적인 '경제 3극'을 구축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다.
크레온 버틀러 채텀하우스 글로벌 경제∙금융 프로그램 디렉터는 최근 '트럼프 충격으로부터 글로벌 경제 거버넌스 구하기' 보고서에서 "트럼프 2기 행정부의 관세 정책과 글로벌 공공재의 후퇴, 중국의 국가주도 경제 모델과 경제적 강압이 동시에 세계경제 질서를 압박하고 있다"며 "규칙 기반 시장경제 질서를 지키기 위해 EU와 CPTPP를 중심으로 한 새로운 경제동맹, 즉 '제3극'을 수립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보고서는 트럼프 2기 행정부 경제정책을 1971년 '닉슨 쇼크' 이후 가장 큰 미국 경제정책의 전환으로 평가했다. 닉슨 쇼크가 달러의 금 태환 중단으로 국제통화체제에 충격을 준 사건이었다면, '트럼프 쇼크'는 세계 무역과 안보, 환경, 개발 등 글로벌 거버넌스 전반을 동시에 흔드는 복합적 충격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트럼프 2기 행정부는 미국 시장 접근권과 안보보장을 지렛대로 동맹국과 파트너를 강압했고, 넷제로(온실가스 순배출량 제로) 전환, 에너지 안보, 국제통화∙금융 안정, 보건, 빈곤 감축 등 글로벌 공공재 지원을 축소하거나 포기했다.
버틀러 디렉터는 이러한 트럼프 쇼크가 일시적 현상에 그치지 않을 것으로 봤다. 관세가 미국 재정수입의 주요 수단으로 자리잡고, 특정 산업이 보호에 의존하게 됐으며, 동맹국들의 미국에 대한 신뢰를 다시 회복하려면 오랜 시간이 걸릴 수 있기 때문이다. 올해 중간선거와 2028년 대선, 미국 법원 판결 등이 트럼프 정책을 일부 제약하는 요인이 되겠지만, 2024년 이전의 모습으로 돌아갈 가능성은 낮다고 봤다.
중국 역시 글로벌 경제 거버넌스를 흔드는 또 다른 축으로 봤다. 중국은 미국처럼 노골적으로 기존 질서를 거부하지는 않지만, 국가보조금, 산업정책, 환율관리, 경제적 강압을 통해 개방시장과 공정경쟁의 원칙을 훼손시키고 있다는 이유에서다. 또 중국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사실상 지원했고, 남중국해 문제에서도 국제중재 판결을 따르지 않고 있다. 버틀러 디렉터는 "미국이 급진적이고 직접적인 방식으로 규칙을 흔든다면, 중국은 점진적이고 구조적인 방식으로 기존 질서를 약화시키고 있다"고 지적했다.
보고서는 트럼프 쇼크에 대응하는 국가들의 선택지를 세 가지로 제시했다. 먼저 미국이 참여하는 IMF, 세계은행, G7, G20 같은 기존 국제기구 안에서 계속 협력하는 방식이다. 이는 정치적으로 가장 쉽지만, 미국이 반대하는 기후, 무역개혁, 개발금융 등의 의제들이 축소되거나 왜곡될 위험이 크다. 다음은 중견국들이 사안별로 '뜻을 같이하는 국가들의 연합'을 만드는 것이다. 이 방식은 유연하지만 외교자원이 많이 들고, 의제 간 상호 양보와 신뢰 축적이 어렵다. 마지막은 규칙 기반 경제질서를 지지하는 국가들이 상설적이고 영구적인 경제동맹, 즉 '경제 제3극'을 구축하는 것이다. 이는 미국과 중국 때문에 보편적 거버넌스가 작동하지 않는 상황에서 규칙 기반 질서를 되살리기 위한 현실적 우회로라는 설명이다.
버틀러 디렉터는 제3극의 출발점으로 EU와 CPTPP의 결합을 제안했다. EU는 세계 최대 무역블록이고, CPTPP는 아시아∙태평양과 미주를 연결하는 개방적 무역협정이다. 양측은 이미 무역과 투자 협력을 위한 대화를 시작한만큼 이를 확대하는 것을 가장 현실적인 방법으로 꼽았다. 또한 EU와 CPTPP는 미국이나 중국에 버금가는 경제 규모를 확보할 수 있으며, 한국, 브라질, 남아프리카공화국 같은 주요 경제국이 참여하면 제3극의 영향력은 더욱 커질 수 있다고 강조했다.
제3극이 다룰 초기 의제는 크게 두 가지로 구성된다. 첫째는 무역과 투자다. △미국의 무역·투자 재협상 압박에 대한 대응 △다자간 임시 상소중재제도의 개선 △WTO의 국가안보 예외 조항 정비 △트럼프식 관세정책의 확산 억제 △핵심광물, 투자심사, 수출통제, AI 기술지배에 대한 공동 대응 등이 포함된다. 둘째는 글로벌 공공재다. 금융안정, 반부패, 지속가능성, 온라인 안전, 기후금융, 개발금융, 국제금융기구의 역할에 대한 대응책 등이 주된 내용이다. 여기에 산업전략, 데이터 공공재, 우주과학, 교육용 AI 연구개발 같은 공동 프로젝트도 추가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비회원국과의 관계 역시 신중하게 설계해야 한다는 주장도 이어졌다. 특히 미국이 제3극을 반미 연합으로 여기고 보복에 나설 수 있는 만큼, 미중에 맞서기 위한 폐쇄적 블록이 아니라 규칙과 투명성, 상호 이익, 비강압 원칙을 지키기 위한 개방적 질서라는 점을 분명히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개발도상국과 저소득국에 대해서는 제3극이 선진국 클럽이 아니라 안정적 무역, 개발재원, 기술접근, 기후대응을 지원하는 플랫폼이라는 점을 보여줘야 한다고 조언했다.
한국의 역할도 중요한 변수로 지목했다. 한국은 일본과 함께 규칙 기반 무역질서를 지지하는 동아시아의 주요 시장경제국이자 CPTPP 가입이 유력한 글로벌 공급망의 핵심 파트너라는 이유에서다. 물론 한국과 일본은 북한과 중국이라는 안보 위협 때문에 미국과의 군사동맹을 대체하기 어렵다는 현실적 제약이 있다. 그럼에도 미국 역시 중국 견제를 위해 한국 내 군사기지와 동맹 네트워크가 필요하기 때문에 한국은 안보동맹을 유지하면서도 동시에 제3극에서 적극적 역할을 모색할 수 있다는 설명이다.
버틀러 디렉터는 제3극을 구축하는 데 있어 장기적 이익이 단기적 비용보다 훨씬 크다고 분석했다. 그는 "제3극 구축은 미국이나 중국보다 더 큰 경제 공간을 구축하고 안정적이고 투명한 규칙에 기반한 질서를 따르면서 공공재 이익을 공유하고 경제적 강압으로부터 자유로운 상호 이익을 추구하게 할 것"이라며 "이는 장기적으로 경제 및 금융 거버넌스에 대한 보편적 규범을 재확립하는 최선의 방법"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