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유권자 신분 증명을 강화하는 내용의 '세이브 아메리카 법안(SAVE America Act·투표자격보호법)' 통과를 촉구하면서 이미 초당적 합의를 얻은 주택공급 확대 법안에 제동을 걸었다.
24일(현지시간)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따르면 트럼프 대통령은 상하원을 통과한 '21세기 주택 공급 확대법'(21st Century ROAD to Housing Act)에 대한 서명식을 돌연 취소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트루스소셜에 "서명식은 국가비상사태에 준하는 세이브 아메리카 법안이 통과될 때까지 취소된다"며 "주택법안은 금리인하와 해외정보감시법(FISA)에 비하면 중요도가 떨어지고 세이브 아메리카 법안 통과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고 말했다. 또 공화당 의원들을 향해 "세이브 아메리카 법안이 통과되도록 설득하라"고 촉구했다.
세이브 아메리카 법안은 투표 때 유권자 신분증 및 시민권 증명 제시를 의무화하고 군 복무·질병·장애·여행 등 불가피한 사정을 제외한 경우 우편투표를 금지하는 내용이다. '미국 시민이 아닌 사람은 투표하면 안 된다'는 취지지만 제정 배경에는 2021년 의사당 난동사태와 부정선거 의혹이 자리한다. 각 주마다 투표방식이 달라서 선거관리가 허술해 시민권이 없는 사람도 투표하게 될 수 있다는 게 트럼프 대통령의 주장이다.
다만 행정적으로 이 법 시행은 불가능에 가깝다는 의견이 우세하다. 미국은 한국의 주민등록번호처럼 고유 식별 번호가 없어서 단일한 유권자 명부를 마련하는 것부터 난관이다. 브레넌 정의센터(Brennan Center for Justice)에 따르면 미국 시민권자 중 여권이나 출생증명서 등 시민권을 즉각 증명할 서류가 없는 유권자가 약 2100만 명(전체 유권자의 11%가량)에 달한다.
이날 제동이 걸린 주택 법안은 주택 공급 확대와 집값 안정화를 위해 각종 규제를 완화하고 대규모 기관 투자자들의 단독주택 매입을 금지하는 것을 내용을 담고 있다. 상원이 85대 5로 법안을 통과시킨 지 하루 만에 하원에서도 358대 32로 법안을 통과시켰다. WSJ는 "1980년대 이후 가장 야심찬 주택 관련 법안"이라고 평가했다.
민생법안에 초당적 지지가 모였지만 트럼프 대통령이 세이브 아메리카 법안 통과를 요구하면서 제동을 걸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 법외에도 정보기관장 인준, 외국인 도·감청법으로 알려진 'FISA 702조' 서명 등을 볼모로 잡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이 사활을 거는 이유는 중간선거를 4개월 앞두고 패배 부담을 완화하려는 시도로 풀이된다. 서류 증명이 까다로워지면 주로 이사가 잦은 청년층, 도시 저소득층, 귀화한 이민자 등이 유권자에서 탈락할 가능성이 높은데 이들은 민주당 지지성향이 우세한 집단이다.
이 법은 공화당 내에서도 반발을 사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민주당 반대로 통과하지 못하자 필리버스터를 무력화하는 '핵 옵션' 발동을 요구하고 있지만 공화당 지도부는 이를 거부하고 있다. 공화당 내에서는 미국-이란 평화 협정을 놓고도 불만이 터져나온 상태여서 협력을 얻기 쉽지 않을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