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관세 정책과 국제유가 상승이 끌어올린 인플레이션(물가상승) 압박이 다소 완화한 가운데 빅테크(기술 대기업)의 AI(인공지능) 투자 열풍이 새로운 물가상승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분석이 제기됐다. AI 데이터센터에 대한 투자 확대가 반도체, 전력, 전자제품 가격 상승을 촉발해 경제 전반에 영향을 줄 거란 지적이다.
24일(현지시간)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주요 빅테크가 AI 경쟁에 전례 없는 수준의 막대한 자금을 투입하고 있고, 이것이 광범위한 인플레이션의 촉매제가 되고 있다고 보도했다. 반도체(칩)발 물가상승을 '칩플레이션'이라 한다면 최근 AI 투자에 따른 인플레는 'AI플레이션'이라고 할 수 있는 셈이다.
팩트셋에 따르면 알파벳(구글 모기업), 아마존, 메타플랫폼, 마이크로소프트(MS), 오라클 등 5개 초대형 클라우드 기업(하이퍼스케일러)의 올해 설비투자 규모는 전년 대비 약 75% 증가한 7410억달러(약 1137조원)로 전례 없는 수준에 달할 것으로 전망됐다.
빅테크의 투자 자금 대부분은 데이터센터 등 AI 인프라 구축에 투입되고 있고, 그 규모는 갈수록 커지고 있다. 스틴 반니우어버그 컬럼비아대 교수는 "2032년까지 AI 인프라 구축 관련 지출이 8조달러(1경2308조원)에 달할 것으로 추산된다. 이는 뉴욕시 전체 부동산 시장 가치의 약 5배에 달하는 수준"이라고 전했다.
기업들의 AI 인프라 투자는 주로 데이터센터 구축에 집중된다. AI 데이터센터에는 첨단 반도체와 서버는 물론 냉각 장비, 광케이블, 전력 설비, 비상 발전기 등 다양한 인프라가 필요하다. 이 때문에 데이터센터 구축 규모가 커질수록 반도체 등 관련 인프라 수요도 자연스레 늘어 가격 상승으로 이어지게 된다. 핵심 자재인 메모리칩은 AI 이외 비디오게임 콘솔부터 자동차까지 광범위한 제품에 사용된다.
WSJ는 "AI 데이터센터 설립에 사용되는 자재는 AI뿐 아니라 다른 산업 전반에 사용되는 자재"라며 "AI 데이터센터발(發) 가격 상승은 다른 산업에도 영향을 주고 경제 전반으로 확산할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했다. 전미기업경제협회(NABE)가 최근 발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경제학자 81%는 앞으로 1년간 AI 인프라 구축이 인플레이션을 높일 것으로 내다봤다.
실제 미 노동부에 따르면 지난달 컴퓨터 소프트웨어와 주변 기기의 소비자 가격은 전년 동기 대비 약 15% 올랐고, 전자부품 도매가격은 전년 대비 27% 상승했다. 일본 닌텐도와 소니는 앞서 제품 가격 인상을 발표했고, 애플과 MS도 25일 제품 가격을 올렸다. 애플 맥북과 아이패드 가격은 100~300달러, MS 게임 콘솔인 X박스 가격은 100~150달러 인상됐다.
팀 쿡 애플 CEO(최고경영자)는 최근 WSJ와 인터뷰에서 AI 열풍으로 메모리 등 부품 가격이 애플이 자체적으로 감당할 수 없는 수준으로 올랐다며 가격 인상 필요성을 시사한 바 있다. 당시 그는 "1000년에 한 번 올까 말까 한 대홍수와 같은 상황이다. 40년 넘는 업계 경력 동안 어느 분야에서도 이런 일을 본 적이 없다"며 부품 가격 인상 어려움을 호소한 바 있다.
미 시장분석업체 에바코어 IS는 AI발 물가 상승은 관세와 국제유가 급등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짚었다. 관세와 국제유가 급등은 일시적인 충격이지만, AI는 수년간 지속될 수 있는 '구조적 수요 증가에 따른 충격'이라는 주장이다. 리사 쿡 연방준비제도(연준) 이사는 지난달 발표된 빅테크의 데이터센터 투자 계획 중 실제 집행된 규모는 아직 일부에 불과하다며 AI발 물가상승이 앞으로 더 심화할 가능성을 경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