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인공지능)와 기술 경쟁 시대에 한국경제는 수출 성공 공식만으로 성공할 수 없고 기술·자본·표준·동맹을 결합한 '생태계 강국'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주장이 미국 싱크탱크에서 나왔다.
나빈 기리샹카르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 경제안보기술부 부장은 '수출 강국이 될 것인가, 생태계 강국이 될 것인가: AI 산업 시대에 한국이 선택해야 할 길(Export Nation or Ecosystem Power: South Korea's Choice in the AI Industrial Age)' 보고서를 통해 "세계에서 가장 성공적인 수출국 중 하나인 한국경제가 첨단 기술 경쟁 시대에 역동적인 성장을 유지하려면 생태계 강국으로 진화해야 하다"며 "두 번째 한강의 기적은 한국 기업들이 세계 시장이 의존하는 신뢰할 수 있는 기술 생태계를 구축할 때 이뤄질 것"이라고 주장했다.
보고서는 먼저 한국이 수출 중심 성장을 이어올 수 있었던 글로벌 경제의 규칙 자체가 바뀌고 있다고 진단했다. 글로벌 공급망이 지정학적 경쟁의 장으로 변했고, 첨단 기술이 국가 간 경쟁의 핵심 무대가 됐기 때문이다. 여기에 세계 무역과 투자가 더 이상 가격과 생산성만으로 결정되지 않고, 안보와 표준, 탄력적인 공급망, 정치적 동맹에 의해 좌우되고 있다는 점도 중요한 변화로 꼽았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새로운 성격의 세계화가 진행되고 있으며, 이는 가격 경쟁력과 우수한 제조 역량을 바탕으로 성장해 온 한국식 수출 모델에 구조적 도전이 되고 있다는 설명이다.
보고서는 미래의 글로벌 경제를 이끌 주체가 단순히 크고 부유한 국가가 아니라고 봤다. 과학적 리더십, 산업 역량, 자본, 표준, 동맹을 결합해 다른 국가와 기업들이 의존하는 생태계를 구축하는 나라가 주도권을 잡게 된다는 것이다. 단순히 좋은 제품을 만들어 파는 기업보다 다른 기업들이 혁신하고 생산하며 경쟁하는 과정에서 반드시 거쳐야 하는 '연결고리'를 장악한 기업과 국가가 가장 큰 경제적·지정학적 이익을 얻을 것이라고 짚었다.
보고서는 한국이 생태계 강국으로 도약할 수 있는 여러 강점을 갖고 있다고 평가했다. △인공지능·반도체·통신으로 대표되는 '스택(핵심 기술 집합)' △배터리와 첨단 제조 시스템 등 정밀 기술 △공작기계와 산업용 로봇을 포함한 생산 역량 △핵심 광물과 에너지 분야 산업 기반 등이다. 다만 각 영역에서 경쟁력을 유지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설명했다. 기리샹카르 부장은 "한국은 각 기술 영역들이 교차하는 제어 지점에 경쟁력 높은 한국 기업들을 배치하는 것을 전략적 목표로 삼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보고서는 SK하이닉스를 한국이 생태계 강국으로 도약할 수 있는 대표 사례로 꼽았다. 고대역폭 메모리(HBM)가 단순한 반도체 부품이 아닌 AI 생태계를 연결하는 핵심 축으로 자리 잡았다고 평가했다. HBM을 대체하려면 칩, 소프트웨어 스택, 패키징(후공정), 데이터센터 인프라 전반을 함께 재설계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는 특정 부품이나 기술이 전체 산업 생태계의 구조와 맞물릴 때 전략적 가치가 커진다는 점을 보여준다. 삼성의 파운드리 기술, LG의 배터리 공정 기술, 한화의 해양 엔지니어링 시스템도 각 산업 생태계 안에서 이와 유사한 전략적 위상을 확보할 수 있다고 분석했다.
보고서는 한국이 생태계 주도 역량을 강화하려면 기존 수출 모델에서는 묻지 않았던 질문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밝혔다. 이제는 단순히 어느 시장에 제품을 더 많이 팔 것인가가 아니라, 어떤 파트너가 한국의 생태계 역량을 키우는 데 기여할 수 있는지를 물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동맹 생태계 구축은 한국의 필수 전략으로 제시된다. 보고서는 첨단 과학기술에 대한 접근성, 장기 투자를 뒷받침하는 수요, 기술 통합을 지속 가능하게 만드는 정치적 연대가 전략적 동맹 생태계의 핵심 요소라고 설명했다.
동맹 생태계 구축은 한국 기업들의 생존 전략 면에서도 중요하다. 한국 기업들은 메모리 가격 하락, 조선 수주 감소, 배터리 마진 축소처럼 경기 변동에 민감한 산업에 많이 포진해 있기 때문이다. 보고서는 한국 기업들이 미국의 AI 인프라, 방산 제품 생산, 핵심 광물 가공 분야 등에 참여하면 이러한 변동성을 장기적이고 안정적인 수요로 전환할 수 있다고 봤다. 특히 핵심 광물 분야는 동맹 생태계 구축의 단기적 시험대가 될 수 있다. 핵심 광물 생태계를 단순한 조달 체계로 볼 것이 아니라, 한국 자본, 미국 수요, 호주 자원, 아세안 가공 시설, 동맹국의 표준을 결합하는 하나의 전략 플랫폼을 구축해야 한다는 설명이다.
투자 자본의 전략적인 운용도 생태계 역량 강화의 중요한 요소로 꼽힌다. 투자 결정을 내릴 때 단순한 매출 확대나 수익률만 볼 것이 아니라, 해당 투자가 한국 기업을 신뢰할 수 있는 기술 생태계에 더 깊이 연결하는지 검토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새로운 기술 표준을 정립하는지, 핵심 연결고리를 강화하는지, 동맹국과 지속적인 상호의존 관계를 구축하는지도 중요한 판단 기준으로 제시했다. 보고서는 "단순히 해외 시장에 투자하는 것이 아니라, 기술적 상호의존성을 심화시키고 대체하기 어려운 관계를 만드는 방식으로 자본을 운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보고서는 한국이 생태계를 구축하는 과정에서 중국보다 미국과의 협력을 우선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국 산업은 미국과 중국 양쪽으로부터 압력을 받고 있지만, 두 압력의 성격은 본질적으로 차이가 있다. 중국의 압력은 한국이 장기적으로 중국에 의존하도록 만드는 구조적 성격을 띠는 반면, 미국의 압력은 동맹국들과 함께 통합된 산업 기반을 구축하려는 목적에 가깝다고 봤다. 무엇보다 한국 사회와 산업계는 이미 미국과의 협력을 강화하고 동맹 기반의 기술 생태계를 구축하는 방향을 선호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기리샹카르 부장은 "한국 정부의 과제는 이러한 기업들의 결정을 국가 전략으로 전환하는 것이며, 미국 정부는 한국을 관세 문제로만 보지 않고 기술 생태계를 함께 만들어갈 파트너로 인식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한국이 수출국에서 생태계 강국으로 전환하는 과정은 과거 한강의 기적을 가능하게 했던 개척 정신을 새로운 전략 환경에 적용하는 일이라고 조언도 이어졌다. 그는 "한국 외교 정책이 이미 생태계 구축에 나선 산업계와 엔지니어들의 야심만큼 대담해야 한다"며 "두 번째 한강의 기적은 글로벌 시장이 점점 더 의존하고 신뢰할 수 있는 기술 생태계 구축에 한국이 기여함으로써 이뤄질 것"이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