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베네수엘라와 650억배럴 규모의 석유를 장기간 독점 거래하는 협정을 체결하면서 파장이 일고 있다. 트럼프 행정부는 마두로 전 대통령을 축출한 뒤 로드리게스 임시 대통령 체제의 안정을 인정하는 대가로 석유 이권과 실리를 챙기겠다는 셈법으로 해석된다. 베네수엘라 내부에선 이번 계약이 주권 포기이자 매국 행위라며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28일(현지시간) SNS(소셜미디어) 트루스소셜을 통해 "미국은 방금 베네수엘라 정부와 세계 역사상 최대 규모의 석유 거래에 관한 합의를 이뤘다"며 "마코 루비오 국무장관과 피트 헤그세스 전쟁부(국방부) 장관이 베네수엘라의 존경받는 델시 로드리게스 임시 대통령과 긴밀히 협력했다"고 밝혔다.
이어 "민간 기업과의 파트너십을 통해 미국 납세자들의 부담 없이, 650억배럴 이상 매장된 베네수엘라 석유에 대한 미국의 과반 통제권을 확보했다"고 강조했다. 미국 민간 석유업체와 베네수엘라 정부가 현지 유전 개발 및 원유 채굴권과 관련한 협력에 합의했다는 의미로 풀이된다. 미국 정부와 베네수엘라의 민간 사업자는 별도 회사를 만들어 100년간 유전 17곳을 개발키로 했다.
베네수엘라의 델시 로드리게스 임시 대통령 역시 "이번 합의로 국가 재정에 2090억달러(약 288조5245억원)가 들어올 것"이라며 미국과의 석유 거래 협정 체결을 환영했다. 다만 그는 29일 심야 연설에서 " 미국과의 국가간 에너지 협정은 25년간 유지될 것"이라며 "원유 생산량을 하루 150만배럴로 늘리는 것을 목표로 하는 동시에 베네수엘라의 천연자원에 대한 주권을 지켜낼 것"이라고 말했다.
석유 주권을 내줬다는 비판을 의식한 듯 '100년간 개발'이란 미국쪽 설명과 온도차를 보였다. 그는 이번 협정은 국가 경제를 살리고 정부 세수를 증대하는 데 도움이 될 역사적인 거래라고 자평했다.
베네수엘라는 세계에서 원유 매장량이 가장 많은 국가다. 현재 확인된 전체 매장량은 세계 석유 공급량의 약 17%에 해당하는 약 3000억 배럴로 추산된다. 이번 계약 규모는 베네수엘라 석유 매장량의 약 22%에 달한다. 그러나 개발 인프라가 낡아 생산량을 마냥 늘리기 어렵다는 분석이다.
전문가들은 이번 합의로 미국 기업과 트럼프 행정부가 로드리게스 체제가 제공하는 '안정성'에 경제적 이해관계를 갖게 됐다고 분석한다. 미국 기업의 대규모 투자가 시작되면 미국 정부의 외교 기조 역시 '조속한 민주적 정권 교체'에서 '정치 교체의 여지를 남긴 채 안정을 우선시하는 방향'으로 이동할 수 있다는 관측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마두로 전 대통령 축출 이후 베네수엘라의 석유 자원 확보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다만 협정의 법적·재정적 구조에 대해선 의문도 제기된다. 미국 정부가 유전을 임차해 직접 운영하는 법적 근거가 베네수엘라 헌법 및 신규 석유가스법상 있는지 명확하지 않은 데다, 미국 정부가 유전 운영을 위해 타 국가와 임대 계약을 맺은 전례는 없다는 점에서다.
베네수엘라 정치권에서의 반발도 적지 않다. 특히 강경파들은 이런 발표에 크게 분노하며 이번 합의의 법적 정당성에 의문을 표했고, 일부는 소셜미디어 게시물을 통해 이를 '주권의 포기'로 규정했다.
유라시아그룹의 리사 그레이스 타르고 라틴아메리카 담당 이사는 "로드리게스와 협력하겠다는 트럼프의 의지를 강화해 신속한 재선거 추진 동력을 낮출 수 있다는 점에서 로드리게스에게 유리하게 작용할 수 있다"며 "이것이 바로 야권이 분개하는 이유"라고 설명했다. 그는 이어 "자원 민족주의에 대한 민감성 등을 고려했을 때 로드리게스에게도 정치적으로 매우 부담스러운 일이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