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르무즈 해협의 부분 폐쇄가 7개월째 이어지는 동안, 세계 에너지 시장은 비축유와 우회 수출 덕분에 1970년대식 오일쇼크는 피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완충장치가 닳아가면서 원유 시장의 충격이 정제유와 LNG, 우회 수출로의 병목으로 옮겨갈 수 있다는 분석이 나왔다.
세계 해상 원유 교역의 약 4분의 1, 액화천연가스(LNG) 교역의 약 5분의 1이 지나던 길이 막히면서 에너지 시장은 사상 최대급 공급 차질을 겪고 있다. 그러나 충격은 1973년과 1979년 오일쇼크와 달랐다. 브렌트유는 4월 배럴당 145달러 안팎까지 치솟은 뒤 8월 말 90달러대로 내려왔다. 최근에는 협상 기대와 결렬 우려가 엇갈리며 100달러 안팎에서 움직이고 있다.
정작 더 아픈 곳은 석유제품이다. 국제에너지기구(IEA)는 9월 석유시장보고서에서 세계 석유 수요의 30% 가까이를 차지하는 경유·가스오일 가격이 9월 초 미국에서 배럴당 200달러를 넘어 전쟁 전보다 94% 높아졌다고 밝혔다. 원유 가격은 오일쇼크의 기억을 자극했지만, 실제 병목은 정제유 시장에서 더 뚜렷하게 나타난 셈이다.
미국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의 조지프 마이컷 에너지안보·기후변화 프로그램 디렉터 등 연구진은 9월 17일 발표한 '세계 에너지 위기를 설명하는 6개의 차트'에서 가격 폭등이 제한된 배경으로 전쟁 전 이미 선적돼 있던 원유, IEA 회원국의 비축유 방출, 미국의 수출 확대, 중국과 일본의 수입 감축을 꼽았다. 호르무즈 차질은 시장을 흔들었지만, 재고와 우회 수출, 대체 공급, 수요 감소가 시간을 벌어준 것이다. 이탈리아 중앙은행 연구진도 같은 날 경제정책연구센터(CEPR) 기고에서 비슷한 계산을 내놨다. 하루 약 2000만 배럴의 호르무즈 물동량이 끊겼지만 전쟁 전 공급과잉, 수요 감소, 대체 공급, 비축유 방출이 이를 메우면서 3~5월 순부족분은 하루 약 1200만 배럴로 줄었다는 것이다.
문제는 이 완충장치가 계속 작동할 수 있느냐다. 토릴 보소니 IEA 석유산업·시장국장은 9월 18일 논평에서 걸프 공급 제약이 이어지고 상업 재고가 빠르게 줄면 "수급 격차를 메우기 위해 더 높은 가격과 추가적인 수요 감소가 필요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이 가운데 미국과 이란의 협상 전망은 여전히 불투명하다. 아바스 아락치 이란 외무장관은 9월 24일 유엔총회 참석차 찾은 뉴욕에서 '7일 내 해협 재개방' 안을 제시했다. 미국의 해상 봉쇄 해제, 최소 120억 달러 규모의 동결자산 해제, 원유 제재 해제가 조건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이를 일단 거부했지만, 중재국을 통한 논의는 계속되고 있다고 AP는 전했다.
[선데이 모닝 인사이트]에서는 CSIS가 향후 변수로 지목한 중국, 비축유, LNG, 사우디 우회로, 미국 수출 등을 짚어봤다.
가장 큰 변수는 중국이다. 세계 최대 원유 수입국인 중국은 전쟁 전 막대한 상업·전략 재고를 쌓아둔 상태였다. CSIS는 중국이 원유 수입을 2025년 평균 하루 1160만 배럴에서 한때 800만 배럴 수준까지 줄이며 세계 수급의 충격을 흡수했다고 분석했다. IEA 집계에 따르면 중국의 해상 원유 수입은 2월 하루 1150만 배럴에서 6월 600만 배럴까지 줄었고, 지난 6개월간 중국의 석유 수요는 2월보다 하루 170만 배럴 적었다.
가스에서도 비슷한 흐름이 나타났다. S&P글로벌의 제임스 태버너 글로벌가스·LNG 리서치 이사에 따르면 중국은 발전 연료를 가스에서 석탄으로 돌리며 LNG 수입을 전년보다 8% 줄였고, 이는 글로벌 LNG 가격 압력을 낮추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중국의 수입은 다시 늘고 있다. 중국 해관총서는 중국의 8월 원유 수입이 하루 893만 배럴로, 7월보다 6.2% 증가했다고 밝혔다. 다만 이를 곧바로 세계 수급 압박의 신호로만 보기는 어렵다. 선박추적업체 보텍사의 에마 리 애널리스트는 로이터와의 인터뷰에서 "원유 수입의 전월 대비 증가는 8월 연료 수출 급증과 맞물려 있다"고 짚었다. 중국 정유사들이 원유를 더 들여와 경유 등 석유제품으로 되파는 흐름이 작용했다는 뜻이다.
중국은 8월 하루 1391만 배럴의 원유를 정제했고, 로이터 계산 기준으로 하루 약 63만9000배럴의 재고를 소진한 것으로 추정됐다. IEA에 따르면 전쟁 이후 비OECD 국가에서 줄어든 원유 재고 1억500만 배럴 가운데 65%가 중국 육상 탱크에서 나왔다. 결국 핵심은 중국의 재고다. 중국이 재고를 더 오래 헐어 쓸 수 있다면 세계 시장은 시간을 벌 수 있다. 반대로 중국이 본격적으로 재고 재축적에 나서면 호르무즈 충격은 다시 가격으로 번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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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수입 조절 능력은 외교 협상력과도 맞물린다. CSIS는 중국의 '스윙 소비자' 지위가 9월 24일 트럼프·시진핑 정상회담에서 미국의 협상력을 약화시킬 수 있다고 내다봤다. 회담 결과물은 양측 각 300억 달러어치 상품의 관세 인하, 중국의 미국산 석탄 연 최소 1000만톤 구매, 어떤 국가도 국제 수로에 통행료를 부과할 수 없다는 원칙 합의 정도였다. 무역 휴전 연장 기간도 예상보다 짧은 두 달에 그쳤다. CSIS의 스콧 케네디 중국 비즈니스·경제 담당 선임고문은 무역·희토류·정제유·투자·AI 분야의 성과가 "모두 상당히 제한적이고 불확실하다"고 평가했다.
두 번째 변수는 비축유다. 비축유는 위기를 끝낸 것이 아니라 가격 폭등을 뒤로 미뤘다.
IEA 회원국은 3월 호르무즈 차질에 대응해 4억 배럴 규모의 비상 비축유를 시장에 공급하기로 했다. 9월 중순까지 3억 배럴 이상이 방출됐고, IEA는 이것이 가격 폭등을 막는 데 기여했다고 자평했다.
하지만 방출은 영구적 공급이 아니다. 미국과 유럽이 언젠가 비축유를 다시 채워야 한다면, 빠듯한 시장에서 추가 수요가 발생한다. 특히 미국 전략비축유(SPR)는 이미 역사적으로 낮은 수준까지 내려간 상태다. 초당적정책센터(BPC)에 따르면 SPR은 7월 24일 3억800만 배럴로 최대 용량 7억1400만 배럴의 절반에도 못 미쳤고, 1983년 이후 최저였다. 비축량이 줄면 저장 동굴의 압력이 떨어져 실제 방출 속도도 이론상 최대치인 하루 440만 배럴에서 100만~140만 배럴로 낮아진다. BPC는 향후 공급 차질에 대비하려면 "SPR 비축량을 다시 확충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짚었다.
다만 재충전이 단기간에 가격을 급등시킬 가능성은 제한적이라는 반론도 있다. 미국의 저장·송유 인프라가 노후화돼 빠른 속도의 재매입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미 회계감사원(GAO)의 5월 보고서에서 에너지부 관계자들은 SPR 설비가 "반창고로" 버티고 있다고 토로했다. 월가의 전망도 완만하다. 골드만삭스는 9월 초 원유 전망 보고서에서 내년 걸프 산유량이 전쟁 전보다 하루 50만 배럴 적은 수준에 머문다는 기본 시나리오 아래 브렌트유 전망을 2026년 12월 배럴당 85달러, 2027년 80달러로 제시했다. 걸프 산유량 부족분이 하루 400만 배럴로 커지면 120달러를 넘고, 반대로 전쟁 전보다 100만 배럴 많아지면 2027년 60달러대로 내려갈 수 있다고 봤다.
세 번째 변수는 LNG다. 유럽은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LNG 수입 인프라와 재생에너지 설비를 늘렸다. 이 때문에 2022년보다 구조적으로는 더 준비돼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당시처럼 유럽이 가격을 불문하고 물량을 빨아들이는 국면은 아직 재현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취약성은 남아 있다. EU 가스 저장률은 9월 중순 기준 약 68.5% 수준으로, 1년 전 80%대와 겨울철 목표치에 모두 못 미쳤다. 저장률이 목표에 접근하지 못하면 정책 개입 가능성이 커지고, 이는 다시 가격을 자극할 수 있다. 더 직접적인 충격은 아시아에서 나타나고 있다.
태버너 이사에 따르면 지난해 호르무즈를 통과한 LNG의 90%가 아시아로 향했다. 페르시아만산 LNG에 가스 공급의 4분의 1을 의존하던 파키스탄은 전쟁 이후 수입이 4분의 3 급감했다. 한국도 LNG 수입을 줄이며 일부 발전 연료를 조정했다. 카타르 공급의 정상화도 시간이 필요하다. 사드 알카비 카타르 에너지장관은 9월 21일 라스라판의 손상된 LNG 트레인 2기를 복구하는 데 3년이 걸린다고 밝혔다. 카타르 공급 정상화가 지연될 경우 아시아와 유럽이 같은 LNG 화물을 두고 경쟁하는 구도는 더 심해질 수 있다.
유럽의 취약성 또한 절대 물량 부족보다 가격 경로에 있다. 카타르 등 중동 LNG에 대한 직접 의존도가 압도적으로 높지는 않더라도, 아시아와 유럽이 같은 LNG 화물을 두고 경쟁하면 가격은 빠르게 뛸 수 있다. 에너지 컨설팅업체 우드매켄지의 마시모 디오도아르도 가스·LNG 리서치 총괄이 9월 가스텍 2026을 앞두고 "유럽은 에너지 위기 국면에 다가서고 있다"고 진단한 이유다.
따라서 LNG 시장의 문제는 단순한 물량 부족이 아니다. 부유한 국가는 높은 가격을 감당해 물량을 확보할 수 있지만, 신흥국은 구매를 줄이는 방식으로 수요 파괴를 겪는다. 가격이 시장을 정리하지만, 그 비용은 국가별로 다르게 배분된다. 결국 호르무즈발 LNG 충격은 유럽의 가격 부담과 아시아 신흥국의 수요 파괴라는 두 경로로 나타나고 있다.
네 번째 변수는 사우디아라비아의 우회 수출로다. 사우디는 동서 송유관과 홍해 얀부항을 통해 호르무즈를 우회해왔다. IEA에 따르면 얀부항과 아랍에미리트(UAE) 오만만 푸자이라항의 수출은 2월 하루 410만 배럴에서 6월 780만 배럴로 늘며 개전 이후 호르무즈 손실분 가운데 5억 배럴 넘게 메웠다. 그러나 홍해에서 후티 반군의 공격이 이어지며 8월에는 550만 배럴로 줄었다. 여기에 9월 공격으로 이 경로마저 제약을 받으면서 시장은 다시 긴장했다. 사우디는 9월 11일 이라크에서 발사된 드론 공격을 받은 뒤 동서 송유관을 닫았고, 브렌트유는 15일 배럴당 108.75달러까지 올랐다.
시장의 반응은 예상보다 차분했다. JP모건의 나타샤 카네바 글로벌원자재전략 총괄은 9월 분석 보고서에서 "중동 원유 흐름은 놀라울 만큼 견조하다"고 진단했다. 원자재 데이터업체 케이플러에 따르면 9월 사우디 원유 수출은 하루 600만 배럴로 개전 이후 최고치를 기록했다. 수출 물량이 미군 호위 아래 다시 호르무즈 쪽으로 이동한 결과다. 사우디는 28일까지 송유관 유량도 하루 약 350만 배럴로 일부 복구했다. IEA 집계로 걸프 국가들의 원유 수출 감소폭은 8월 전쟁 전 대비 45% 미만으로 줄었지만, 석유제품과 LPG 수출은 여전히 2월보다 60% 가까이, 하루 370만 배럴 적다.
하지만 이는 역설적으로 위험 신호이기도 하다. 우회로가 작동했기 때문에 가격 폭등은 막았지만, 우회로 자체가 공격 대상이 된 이상 시장의 안전판은 이전보다 약해졌다. 우회로가 늘어난 만큼 공격 가능한 지점도 늘었다. 해협 통행도 여전히 불안정하다. 골드만삭스에 따르면 9월 초 열흘간 호르무즈를 지난 화물선은 하루 평균 10척으로 5월 이후 가장 적었다.
마지막 변수는 미국이다. CSIS는 미국이 셰일혁명과 멕시코만 연안의 정제·수출 인프라를 바탕으로 세계 에너지 시장의 새로운 스윙 공급자로 부상했다고 평가했다.
미국은 전쟁 전부터 원유와 석유제품을 대규모로 수출했고, 위기 이후 LNG 수출에서도 아시아 비중을 크게 늘렸다. 그러나 미국의 역할에도 한계가 있다. 병목은 원유보다 경유다. IEA에 따르면 걸프 국가들의 8월 경유 순수출은 전쟁 전의 4분의 1 수준에 그쳤다. 우크라이나의 공격으로 러시아 정제설비까지 차질을 빚으면서 세계 경유 시장은 더 빠듯해졌다. 미국 내 경유 재고가 낮고 가격이 급등한 상황에서는 수출 확대가 곧 정치 문제가 된다.
실제로 미국 행정부 내부에서는 경유 수출 제한 가능성이 거론됐다. 하지만 미국은 세계 최대 경유 수출국이다. 수출을 막으면 국내 가격을 일시적으로 낮출 수 있을지 몰라도, 세계 공급망을 교란하고 다른 석유제품 가격까지 밀어올릴 수 있다. 결국 미국의 병목은 지질학이 아니라 정치다. 셰일과 정제시설은 더 많은 물량을 낼 수 있지만, 유권자가 높은 연료 가격을 감수할지는 다른 문제다.
IEA는 9월 석유시장보고서에서 올해 세계 석유 수요가 하루 250만 배럴 감소할 것으로 전망했다. 이는 전월 전망보다 감소폭이 하루 94만 배럴 더 커진 것이다. 수요 감소는 가격 폭등을 막는 요인이지만, 동시에 세계 경제가 높은 가격을 견디지 못하고 소비를 줄이고 있다는 신호이기도 하다.
호르무즈 위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중국은 재고를 얼마나 더 헐어 쓸 수 있는가. IEA 회원국은 비축유를 언제 다시 채울 것인가. 유럽과 아시아는 낮은 가스 재고와 높은 LNG 가격을 견딜 수 있는가. 사우디의 우회로는 추가 공격을 견딜 수 있는가. 미국은 국내 정치 압박에도 경유와 LNG 수출을 유지할 수 있는가.
지난 7개월의 교훈은 명확하다. 세계 에너지 시장은 1970년대보다 유연해졌다. 그러나 유연성이 곧 안전을 뜻하지는 않는다. 초기 몇 달의 회복력을 면역력으로 오해해서는 안 된다. 비축유, 우회로, 수요 감소, 미국 수출은 충격을 늦췄지만 해협을 대체하지는 못했다. 방파제는 시간을 벌어줬을 뿐, 바다를 없애지는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