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김밥이다. 대한민국 골목상권의 모세혈관을 채우는 분식집의 주요 메뉴이자 주머니 가벼운 서민의 든든한 에너지원이다.
1970년대 까까머리 남학생들과 단발머리 여학생들의 가슴을 설레게 하던 소풍날 아침, 새벽잠을 쫓으며 어머니가 말던 게 나였다. 은박지에 싸인 나는 삶은 달걀 두어 개, 신문지에 싼 소금, 사이다 한 병과 함께 나들이를 갔다. 노란 단무지와 볶은 당근, 초록빛 시금치가 전부였지만 한 입 베어 물면 입안 가득 퍼지던 고소한 참기름 냄새를 어찌 잊으랴.
1997년 IMF 외환위기의 칼바람 속에서도 1000원짜리 지폐 한 장으로 직장인들의 허기를 달래 줬다. 2000년대 들어 24시간 프랜차이즈가 우후죽순 생기면서 나는 늘 사람들의 곁에 있는 음식이 됐다. 이후 아보카도와 명란 등으로 속을 채운 '프리미엄 김밥'으로도 진화했다. 이제는 세계인의 입맛을 사로잡는 K-푸드의 주역으로 떠올랐다.
그러나 지금 나는 모국에서 내 존재의 거처를 잃어가고 있다. 김밥 전문점과 분식집은 소리 없이 셔터를 내리고 있다. 전국 분식점 사업자는 최근 2년 7개월 사이 약 12% 줄었다. 서울에서 내 몸값은 한 줄 평균 4000원에 육박한다. 참치나 소고기가 들어가면 더 비싸진다. 사람들은 내가 '인플레이션의 주범'이라도 된 양 타박하고 김밥집 사장님을 흘겨본다.
하지만 내게도 그럴 만한 사정이 있다. 내 몸을 이루는 밸류체인 전체가 글로벌 원자재와 에너지 충격의 한복판에 노출돼 있다. 경제학의 렌즈로 보면 나는 '글로벌 공급망의 집약체'다. 지름 5센티미터 남짓한 내 둥근 몸속에는 거시경제의 여러 충격파가 겹겹이 말려 있다. 무슨 말이냐고? 하나씩 풀어보자.
전쟁은 에너지와 곡물 시장을 요동치게 했다. 천연가스 가격이 뛰자 화학비료 가격이 치솟았다. 유가 급등은 연료비와 물류비를 끌어올렸다. 이는 쌀과 시금치, 당근 같은 채소의 생산원가로 전이됐다. 곡물값 폭등은 사료값을 자극해 달걀과 햄, 소시지 가격도 밀어 올렸다. 더 비싸진 주방의 가스비와 전기료 청구서도 가세했다.
나를 감싸 안는 '김'의 변신도 한몫했다. '바다의 반도체'라 치켜세우며 해외 바이어들이 달러를 싸 들고 사 간다. 글로벌 수요가 폭증해 수출 단가가 치솟았다. 그렇지만 양식과 가공을 거쳐야 하는 김의 공급은 단기간에 늘리기 어렵다. 국내 가격도 덩달아 올랐다. 그 유탄을 동네 분식집이 고스란히 맞았다.
게다가 나는 태생부터 사람 손을 빌려야만 하는 '노동집약적' 음식이다. 밥을 짓고 여러 재료를 손질해 말아내기까지 손이 많이 간다. 작은 동네 가게에 자동화 설비는 언감생심이다. 해마다 누적된 최저임금 인상과 매달 내야 하는 상가 임대료 부담으로 더 이상 버티기 어렵다. 이익이 남아나질 않는다.
대체재들은 이 공백을 깊숙이 파고들었다. 소비자들은 공장형 대량생산 라인에서 찍어낸 1000원대 편의점 삼각김밥과 저가 도시락으로 발길을 돌렸다. 패스트푸드점의 할인 메뉴와 HMR(가정간편식) 역시 나의 라이벌이다. 김밥집 아주머니의 손맛과 온기는 '규모의 경제'로 무장한 거대 유통망 앞에서 무력하다.
결국 나는 지금 한국 경제의 한 단면을 온몸으로 드러내고 있다. 반도체 수출 호황과 K-컬처의 승전보는 계속되고 있지만, 내수 침체와 고물가 속에 자영업자들은 폐업의 벼랑 끝으로 내몰린다. 그 불균형의 축소판이 바로 나다. 화려한 수출 지표와 초라한 내수 침체 간의 괴리는 좁혀지지 않을 것처럼 크다.
사람들은 나를 '금(金)밥'이라 부르지만 몸값이 금처럼 뛰었다고 해서 내 배가 부른 것도 나를 마는 사장님의 주머니가 두둑해진 것도 아니다. 내 몸값 상승은 탐욕의 결과가 아니라 생산비와 고정비의 덫에 갇힌 자영업의 한숨이자 경제의 허약한 기초체력을 드러내는 몸살이다. 그래서 나는 슬픈 김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