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배, 저 여기 있어요.” 과묵하기로 소문난 막내 후배가 ‘괴성’ 가까운 소리로 정적을 깨웠다. 평소 컴퓨터처럼 무엇이든 척척 알아맞히던 고참 선배는 감귤주스를 먹고 이온음료로 착각하는 실수(?)를 저질렀고, 김을 만지고 수세미라고 자신 있게 대답하던 여자 선배는 체험이 끝난 뒤에야 자신의 ‘오답’을 인정해야 했다.
지난 14일 서울 종로구 가회동 ‘어둠속의 대화’ 전시장. ‘빛이 없는 어둠 속 일상여행’이란 부제가 달린 이곳은 일반인이 어둠 체험을 통해 시각장애인의 삶을 직접 느껴보는, ‘다름’과 ‘차이’를 이해하는 공간이다.
지난 2010년 신촌에 상설전시관이 처음 생겼고, 지난해 11월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내친 김에 머니투데이 기자들이 이날 체험을 통해 무엇을 이해하고, 어떻게 달라졌는지 변화를 직접 맛보기로 했다.
◇ "세상에! 분명 캔 커피 마셨는데, 알 고보니 곡식음료였다고?"
스마트폰, 컴퓨터 등 발광(發光)하는 기기들에 전적으로 의존하며 사는 정보미디어과학부 기자 7명과 번쩍이는 무대 조명에 익숙한 문화부 기자 1명이 어둠속 세상에 발을 내디뎠다. 1회당 최대 수용 입장수는 8명. 4명씩 두 팀으로 가르고, 눈을 대신할 도구로 지팡이도 받았다. 안내는 전시장의 길을 잘 아는 ‘로드마스터’가 맡았다.
100분간 이어지는 칠 흙같이 어두운 이곳에 한줄기 빛을 안겨줄 무기는 로드마스터의 안내와 동료들의 관심, 시각을 제외한 나머지 감각을 이용한 몸부림뿐이다.
재미 반, 놀이 반으로 시작한 체험은 그러나 시작부터 막혔다. 숲, 도로, 거리, 상점, 카페 등 우리가 흔히 접하는 일상의 장면으로 구성된 전시장은 더 이상 일상이 아니었다. 귀로 들리는 새의 노랫소리, 손으로 만져지는 나무의 감촉, 책장을 넘길 때 풍기는 향기, 정체를 모른 채 목으로 넘긴 콜라의 맛은 분명 이전에 느끼지 못한 ‘새로운 경험’이었다.
눈이 사라지니, 청각이 예민해졌다. ‘김.고.금.평’과 ‘학.렬.라.인’ 두 팀명은 8명의 참가자들 모두 자신의 존재를 각각 ‘증명’하는 청각의 신호였고, 존재확인증명서 같은 이 신호로 참가자들은 ‘곁에 있다는 기쁨에’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참가자 중 이학렬 기자는 “입장하기 전 팀원과 나눈 대화 소리보다 어둠속에서 나눈 대화가 더 또렷하게 들렸다”며 “청각이 더 예민해진 신체 변화가 흥미로웠다”고 했다.
‘닫힌 눈’은 많은 것을 변화시키고 각인시켰다. 캔커피와 아침햇살을 혼동하고, 안먹어도 쉽게 맞출 것 같은 콜라도 알아채지 못한 놀라운 결과에서 참가자들은 ‘시각이 먹는 음식의 맛을 좌우한다’는 말을 그대로 체험했다. 시각 대신 사용된 감각들(청각, 미각, 후각, 촉각)로 몸의 피로감은 더욱 커졌다.
배규민 기자는 “100분 체험이 마치 마라톤을 뛴 기분처럼 느껴졌다”며 “평소 크게 생각하지 않았던 감각 기관이 이렇게 예민하고 활발하게 사용될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고 했다.
류준영 과학기자는 “체험하는 동안 인간에겐 오감을 넘어 육감, 칠감 정도가 있지 않을까란 생각이 문득 스쳤다”며 “시각이 아닌 초음파로 세상을 본다는 박쥐처럼, 인간에게도 숨겨진 감각이 존재한다면 이는 기존 오감이 모두 연결된 상태라고 의미할 수 있을 것 같다”는 ‘특별한’ 해석을 내놓았다.
‘어둠속의 대화’는 비단 ‘내 몸의 상태’를 재발견하는 자리만은 아니었다. 미처 몰랐던 감각의 사용을 통해 보지 못하고 관심 갖지 못했던 것에 대한 새로운 ‘눈뜸’을 확인하는 자리였고, 혼자만 보는 세상을 같이 볼 수 있음을 깨닫게 해주는 ‘동행’의 통로였다.
◇ "다 보인다는 이유로 정성들여 만지고 귀 기울인 적 있던가…"
강미선 기자는 “평소 무언가를 이렇게 정성들여 만져보고 귀 기울여 본 적이 있었나를 체험을 통해 반성했다”고 말했다. ‘과묵 후배’라는 선입견이 와르르 무너진 것도 이번 체험이 주는 교훈이었다. 강 기자는 “직접 경험하지 않고 함부로 갖게 되는 선입견이나 힘이 돼줘야 할 때 곁에 있는 작은 용기들을 ‘어둠속의 대화’에서 많이 배웠다”라고 했다.
어둠속에 헤매던 참가자들은 60분이 지났을 때, 낯섦을 익숙함으로 받아들였다. 불안한 마음에 벽을 잡으며 잰걸음으로 걷던 이들은 이제 과감한 시도를 단행한다.
각 팀이 서로 섞이기도 하고, 어떤 방향에서 어떻게 행동해야할지 요령도 파악한다. 그러다 길을 잃으면 다시 팀명을 부르며 뭉치고, 서로의 목소리를 분간하고 대화를 시작한다.
홍재의 기자는 “로드마스터의 안내가 나오기 전까지 아무것도 못하는 상황이 속출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홀로서는 법을 차근차근 익히게 됐다”며 “짧은 시간 안에 인생의 교훈을 제대로 배운 것 같다”고 했다.
참가자들은 체험이 끝난 후 “가족이 함께 하면 좋을 체험 프로그램”이라고 입을 모았다. 로드마스터는 “아이들은 어둠을 무서워할 거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시각에 의존해 살아온 시간이 어른보다 훨씬 짧기 때문에 어둠에 적응이 더 빠르다”고 설명했다.
어둠속에서 어른보다 더 빨리 달리는 아이들을 보면, 아이에 대한 어른의 평소 시각도 새롭게 열리지 않을까. ‘썸’ 타는 남녀도 체험 후 연인이 될 수 있고, 동료들의 불편한 관계도 개선될 수 있다는 기대감은 이곳이 ‘틀림’이 아닌 ‘다름’을, ‘차별’이 아닌 ‘차이’를 제대로 인식하는 소통의 창구이기 때문이다.
로드마스터는 이렇게 말했다. “미각에 앞서 시각으로 맛을 느끼는 모순. 시각만큼 왜곡이 쉬운 감각기관이 있을까요?”
‘어둠속의 대화’는 1988년 독일에서 시작된 전시로 유럽, 아시아 등 세계 30개국 160개 도시에서 진행되고 있다. 국내에서는 네이버의 자회사형 표준사업장이자 사회적기업인 ‘엔비전스’가 운영하고 있으며, 2010년 국내에서 상설전시를 시작한 이래 약 20만 관람객을 동원한 바 있다. 직원 25명 중 18명이 시각장애인으로 고용창출 성과와 더불어 장애인 인식 개선 효과를 이끌어낸 긍정적 사례로 평가받고 있다.
관람 후 만난 송영희 엔비전스 대표는 “이 전시는 단순한 시각장애 체험이 아니다”며 “보이는 삶과 보이지 않는 삶에 대한 경험을 통해 ‘다름’에 대한 사회적 편견을 줄여가는 시간이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관람가 8세 이상. 관람료 2만~3만원. 02-313-997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