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현정 전 서울시립교향악단(서울시향) 대표가 자리에서 물러난 지 1년 6개월이 지났다. 그 사이 그가 경찰수사에서 얻은 건 '무혐의'고, 잃은 건 '평판'이다.
박 전 대표는 지난 3월 "정명훈 감독이 언론 인터뷰에서 자신에 대해 성희롱과 폭언을 인정하는 취지로 말했다"며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했다. 정 감독도 명예훼손과 무고 혐의로 맞섰다.
서울중앙지검 첨단범죄수사2부는 지난달 14일 박 전 대표를 조사한 데 이어 오는 14일 검찰에 출석하는 정 감독을 조사할 예정이다.
두 사람의 공방은 경찰 조사만 보면 박 전 대표의 '완승'이다. 경찰은 서울시향 직원들이 박 전 대표를 상대로 성추행과 인사 전횡을 일삼았다며 낸 호소문에 대해 '직원들의 조작극'으로 결론 내고 박 전 대표를 '혐의없음' 의견으로 검찰에 송치했다.
박 전 대표가 경찰 수사에서 '반전의 주역'으로 떠오른 것은 정 감독의 부인 구모씨가 정 감독의 비서 백모씨에게 보낸 문자가 결정적 증거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그 내용의 핵심은 구씨와 백씨 사이에 오간 문자에서 드러난 "사모님, (성추행 대상자) 곽모씨 섭외했습니다", "박 대표를 사회적으로 매장해야 한다" 등이다. 박 전 대표는 경찰이 묻고 자신이 대답하는 과정에서 들은 문자의 구체적 진술을 메모했고, 일부를 언론에 공개했다.
최근 다시 만난 인터뷰 자리에서 그는 그간 알려지지 않았던 경찰에서 들은 내용을 추가로 공개했다. 이번에는 정 감독의 가족과 스태프가 아닌, 박원순 서울 시장의 부인 강모씨, 사회적 기업 H 이사장의 이름이 거론됐다.
-박원순 서울 시장의 부인 이름이 나오게 된 것은.
▶경찰이 정 감독의 비서 백씨의 휴대폰을 샅샅이 조사해 나온 문자 분량이 80페이지에 이른다. 문자들은 모두 구씨가 백씨에게 보낸 것들이다. 경찰은 그 문자를 보다가 모르는 이름이 나올 때마다 내게 물었다. 이 사람은 누구냐, 저 사람은 누구냐. 그러다 강씨와 어떤 관계인지 묻길래, 박 시장 부인으로 알고 있다고 했다.
-문자의 내용은 무엇이었나.
▶강씨가 구씨에게 보낸 문자를, 구씨가 백씨에게 재전송한 내용은 이랬다. "유럽의 겨울을 꼭 다시 가보고 싶습니다." 2013년 10월이나 11월쯤 강씨가 유럽으로 간 적이 있다고 들었다. 강씨는 그 이후 이런 문자도 보냈다. "시장한테 다시 말씀 드렸습니다. 아마 잘 될 것 같습니다." 이 대목은 민원으로 볼 수밖에 없다. '무엇을' 말씀드렸는지 그 내용은 불분명하다. 그것이 이번 서울시향 사태인지, 콘서트홀 건립 문제인지, 예산 문제인지 확인할 길은 없으나 시장 부인이 민원에 나선 것만으로도 (협력) 의혹이 생기는 대목 아닌가.
-불분명한 목적성 때문에 '연루' 의혹을 말하기 어렵지 않은가.
▶구씨와 강씨 사이에 오간 문자라면 어느 정도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구씨가 강씨한테 받은 문자를 백씨에게 다시 보낸 이유는 뭘까. 구씨와 백씨가 이 문자를 공유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중요한 사안이기 때문 아니었을까. 경찰이 재차 물어봤다. 2014년 11월 28일에 무슨 일이 있었냐고. 서울시의회에서 시의원이 서울시장에게 정 감독 횡령 문제 등을 포함한 여러 문제에 대해 시정 질의를 했다고 답했다. 경찰이 전한 문자 내용은 시장 부인이 구씨한테 미안하다는 사과글이었다. 이 문자 역시 백씨에게 전달됐다. 시의원이 정 감독의 독주회나 횡령 부분에 대한 질의를 하는데, 시장 부인이 구씨에게 "감독님을 잘 모셔야 하는데, 잘 못 모셔서 죄송하다"는 내용을 보낸 것 자체가 이해가 되는 얘기인가. 시의회 의정활동 등 공적 업무에 대해 시장 부인이 사과를 통해 언급하는 것이나 구씨가 이 문자를 다시 백씨에게 보낸 것 모두 상식 밖의 일이다.
-경찰이 물어본 또 다른 인물의 이름은 무엇인가.
▶사회적 기업 H 이사장이다. 경찰은 문자에서 H씨가 나오는데, 이 사람은 또 누구냐고 물었다. 아니, 이렇게 물었다. '이 사람이 누군데, 시장을 움직이느냐'고. 경찰이 전달한 문자 내용은 이랬다. 물론 구씨가 백씨에게 보낸 것이다. 'H 이사장한테 이르듯이 문자를 보내면 시장을 움직여 줄거야' 이르듯이라는 표현에서 느껴지는 뉘앙스는 사무 관계를 뛰어넘는 것 아닌가. 2013년 대표로 왔을 때, 서울시 정무 비서관이 내게 해준 얘기가 있다. 정 감독이 2011년 재계약 당시, 겉으로는 (재계약) 안 한다고 하고, 뒤로는 H 이사장을 통해 박 시장에게 압력 넣어서 굉장히 힘들다고 했다. 정 감독은 내게 '우리 부부가 H 이사장 부부랑 돈독한 사이'라고 자주 말했는데, 그땐 그 의미를 제대로 몰랐다.
서울시 비서관은 박 전 대표의 이야기에 대해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했다. H 이사장 측은 구씨가 백씨에게 보낸 문자 내용과 관련해 "모르는 일"이라고 일축했다.
강씨가 유럽 여행을 갔다는 주장과 관련해 서울시는 "그해(2013년) 유럽 여행을 간 적이 없다"고 부인했다. 서울시 관계자는 박 전 대표가 경찰 조사를 통해 들은 내용에 대해선 "박 전 대표가 수사를 받는 과정에서 본 문자메시지 몇 가지를 주관적인 관점에서 짜깁기해 의혹을 부풀리고 있는 일방적 주장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박 전 대표가 거론한 인물들의 지도는 단순한 듯 복잡한 구조를 띠고 있다. H 이사장이 몸담은 사회적 기업에서 박 시장은 상임이사로 2007년까지 재직했고, 정 감독이 이사장으로 있는 사단법인 '미라클 오브 뮤직'에 H 이사장은 이사로 지난해 8월까지 활동했다.(등기부상으로 퇴임 일자는 2013년으로 소급 기재)
박 전 대표는 "경찰이 이 사건의 등장인물이 너무 많아 '수호지' 같다는 얘기를 했다"며 "검찰 수사에서 다른 건 몰라도 문자의 내용이 모두 공개돼 진실이 밝혀졌으면 좋겠다"고 했다.
일각에선 박 전 대표와 정 감독의 명예훼손 혐의에 대한 쌍방 고소가 중지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표면적으로는 두 사람의 공방이 우선인 듯하지만, 선결 과제는 서울시향 사태를 조작극으로 이끈 혐의를 받는 직원 10명과 구씨에 대한 조사다.
14일로 예정된 검찰 소환에 정 감독은 "조사에 응하겠다"고 했지만, 정부를 상대로 1억 원 상당의 손해배상까지 청구한 구씨는 출석 거부 의사를 밝힌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 국적자인 구씨는 현재 프랑스에 체류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