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후 ‘반민특위’로 국민이 분열됐다.”
지난 3월 나경원 자유한국당 원내대표의 이 발언으로 반민특위와 친일, 해방전후사의 인식 같은 현대사의 중요한 순간들이 다시 한 번 화두로 떠올랐다.
‘반민특위’(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의 의미와 과정을 잘 모르는 세대들은 반민특위가 무엇인지 정의와 의미를 좇으려는 시도가 적지 않았고, ‘반민특위’를 위해 싸웠던 이들은 사실의 왜곡을 바로잡으려는 움직임이 거셌다.
때마침 올해 ‘반민특위’ 발족 70년, ‘해방전후사의 인식’ 출간 40주년을 맞아 이를 되돌아보는 책 ‘반민특위의 역사적 의미를 다시 묻는다’가 나왔다.
김민웅 경희대 교수의 ‘1949년 반민특위와 오늘’, 당시 경향신문 기자였던 오익환의 ‘반민특위의 활동과 오해’, 김언호 한길사 대표의 ‘나의 ’해방전후사의 인식‘ 만들기 역사정신 체험하기’ 세 글을 통해 역사적 진실을 좇는다.
3일 서울 중구 순화동천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김언호 대표는 “‘반민특위’의 상황을 통해 역사적 진실을 제대로 알리는 게 목적”이라며 “복수하자는 차원이 아닌, 잘못을 반복하지 말자는 취지”라고 출간 배경을 설명했다.
김민웅 교수는 “이 책이 나오기 전까지 ‘반민특위’는 위험한 논의였다”며 “해방 이후 가장 중요한 문제는 반민특위 와해인데, 이번 용기 있는 작업을 통해 70년의 비극적 사건의 고리를 끊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첫 글 ‘1949년 반민특위와 오늘’은 반민특위의 실패를 냉전정책에서 찾는다. 소련이 팽창하던 상황에서 미국은 주도권을 쥐게 될 좌파를 주시할 수밖에 없었고, 냉전정책을 다시 수정해야 했다. 소위 ‘역코스’로 불리는 냉전정책은 유럽에선 나치세력을, 아시아에선 일본 제국주의 세력을 부활시키는 것이었다.
친일 세력을 제거하기 위한 ‘반민특위’ 활동이 와해된 건 단순히 이승만의 정치적 판단 때문만은 아니었다. 미국의 ‘의도된 설계’ 탓인 셈이다.
김 교수는 “이승만과 친일세력이 손잡고 ‘반민특위’ 활동을 방해하고 주류로 진입한 것이 오늘 우리의 비극”이라며 “‘반민특위가 국민여론을 분열시켰다’는 정치인의 망발은 그 비극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꼬집었다.
‘반민특위의 활동과 와해’에선 반민특위 성립과 해체 과정이 자세히 기술돼 있다. 이승만 대통령이 당시 ‘반민특위’ 법안을 공포하지만, 활동은 채 1년도 유지되지 못하고 해체한다. 이 기간 682건의 친일파를 다뤘으나 실제 체형(體刑, 형벌)이 선고된 사람은 고작 7명이었다.
저자는 반민특위에 대한 견제가 이승만 정권 차원에서 얼마나 조직적으로 진행됐는지 반민특위 요원 암살음모와 반민특위 습격 사건을 통해 집중적으로 고발한다.
마지막 글은 김언호 대표가 ‘해방전후사의 인식’을 기획하고 출간하면서 겪은 이야기를 정리했다. 반민특위의 존재와 역사를 공론화한 책 ‘해방전후사의 인식’은 1979년부터 1989년까지 총 6권으로, 학자 47명이 다양한 관점에서 서술했다. 1979년 초판 5000부가 무섭게 팔려나가면서 지금 촛불혁명의 ‘시대정신’처럼 읽혔다.
김 교수는 “친일파는 생물학적으로 소멸됐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정신적·역사적으로 살아있고 이 때문에 반민특위 임무는 여전히 작동한다”며 “‘반민특위’를 되돌아보는 것은 촛불혁명의 성과를 다시 짚어볼 수 있는 작업”이라고 역설했다.
김 교수는 또 “우리가 ‘반민특위’를 제대로 알고 대처해야 역사의 비극을 되풀이하지 않고 새로운 미래를 설계할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