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AI)과 반도체를 둘러싼 글로벌 경쟁이 치열해지고 있다. 각국은 대규모 투자와 기술개발을 통해 미래 산업의 주도권 확보에 나서고 있지만, 최근에는 기술력 못지않게 안정적인 전력 공급 능력이 중요한 경쟁 요소로 부상하고 있다. AI 데이터센터와 반도체 공장은 대표적인 전력 다소비 산업으로, 이제 전력은 단순한 기반시설을 넘어 산업 경쟁력을 결정하는 핵심 인프라가 되고 있다.
특히 생성형 AI 확산과 함께 데이터센터의 전력수요는 급격히 증가하고 있다. 반도체 생산시설 역시 24시간 안정적인 전력공급이 필수적이다. 문제는 이러한 대규모 전력수요가 수도권에 집중되고 있다는 점이다. 반면 재생에너지와 원자력 등 주요 발전설비는 비수도권 지역에 분산돼 있어 전력계통이 부담해야 할 비용과 위험도 커질 수밖에 없다.
지금 우리 전력계통이 직면한 가장 큰 과제는 발전설비 부족이 아니라 송전망의 부족이다. 발전소를 건설하더라도 이를 수요지까지 안정적으로 전달할 송전망이 부족하면 산업 성장 역시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초고압 송전선로와 변전설비의 확충은 주민 수용성 문제와 환경 규제, 장기간의 인허가 절차 등으로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다. 전력망 병목 현상이 산업 경쟁력의 병목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는 이유다.
이제는 산업정책과 전력정책을 별개의 영역으로 접근하던 방식에서 벗어나야 한다. 첨단산업의 입지를 결정할 때 노동력과 교통, 용수 공급뿐 아니라 전력공급 능력과 계통 여건을 함께 고려하는 통합적 접근이 필요하다. 산업이 전력을 따라가는 구조를 만든다면 사회적 비용을 줄이는 동시에 전력망의 안정도를 높일 수 있다. 실제로 글로벌 빅테크 기업들도 데이터센터와 첨단 제조시설의 입지를 결정할 때 전력공급 안정성과 재생에너지 확보 가능성을 핵심 기준으로 삼고 있다. 충분한 전력과 계통 수용능력을 갖춘 지역이 미래 산업의 새로운 성장 거점으로 부상하고 있는 것이다.
최근 정부와 산업계에서 AI 데이터센터와 반도체 생산시설의 비수도권 분산 유치를 본격적으로 논의하는 것도 이러한 배경과 무관하지 않다. 이는 단순한 지역균형발전 정책을 넘어, 수도권에 집중되어 있는 전력수요로 인한 전력망 부담을 완화하고 국가 전력계통의 안정성을 높이는 동시에 새로운 산업 성장축을 육성하는 전략적 선택이라 볼 수 있다. 전력을 생산한 지역에서 소비하는 지산지소(地産地消)의 원칙은 송전망 투자 부담과 송전 손실을 줄이고 산업 경쟁력의 확보에 기여할 수 있다.
AI 시대의 산업 경쟁력은 결국 전력 인프라 경쟁력에서 출발한다. 앞으로는 전력이 부족한 곳에 송전망을 계속 확충하는 방식만으로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전력 인프라와 산업 입지를 함께 설계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이 필요한 이유다. 안정적인 전력공급 체계와 효율적인 전력망 운영은 지속가능한 K-반도체와 AI 산업의 성장을 위한 필수 조건이며, 대한민국이 미래 산업 경쟁에서 우위를 확보하기 위해 반드시 갖춰야 할 국가적 경쟁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