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에 다니며 서울에 자가를 가진 이가 몇이나 될까? 대한민국의 10%도 되지 않을 것이다. 적잖은 이들이 부러워하면서 그들의 투정에 "배부른 소리"라 할 수 있다.
그럼 질문을 바꿔보자. 집 한 칸 마련하기 위해 30년 가까이 부지런히 일하고, 50대에도 회사에서 밀려나지 않기 위해 아등바등 사는 이 시대의 가장은 몇이나 될까? 여기저기서 손을 들 것이다.
지난달 25일 포문을 연 JTBC 드라마 ‘서울 자가에 대기업 다니는 김 부장 이야기’(김 부장 이야기)는 ‘서울 자가’와 ‘대기업’이 아니라 ‘김 부장’에 방점이 찍혀야 옳다. 밖에서 볼 때는 꽤 근사해 보이지만, 김 부장의 삶은 녹록지 않다. 수면 아래서 수없이 발을 휘젓는 백조와 다름없다. 그 발동작을 멈추는 순간 가라앉는다. 회사 밖으로 밀려난다는 뜻이다.
서울 자가와 대기업이라는 타이틀은 열심히 산 그의 유일한 전리품이다. 하지만 구축 아파트에 사는 그의 삶은 서울 강남 아파트에 사는 또 다른 후배의 삶과 비교되며 박탈감을 느낄 따름이다. 이처럼 ‘김 부장 이야기’는 2025년 대한민국에서 ‘버티는 삶’을 사는 모든 가장들의 자화상이다. 그래서 "공감간다" "짠하다"는 반응과 더불어 "극사실주의 드라마라 보기 힘들다"는 타박도 나온다.
김 부장의 삶을 대변하는 대사로 이 드라마의 정서와 메시지를 톺아본다.
#"대기업 25년차 부장으로 살아남아서 서울에 아파트 사고, 애 대학까지 보낸 인생은 위대한 거야"
김 부장의 풀 네임은 김낙수(류승룡)다. ‘낙수’(떨어지는 물)라는 이름조차 어딘가 위태롭다. 그의 삶은 꽤 괜찮다. 항상 곁에서 응원해주는 아내, 그리고 서울 명문 사립대에 다니는 아들이 있다. 그래서 김 부장은 자신의 삶에 대해 "위대하다"고 자신있게 말한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현재 소유하고 있는 아파트는 남편의 반대를 무릅쓰고 매매를 결정한 아내 덕에 생겼다. 김 부장의 말을 들었다면 지금도 세입자 신세를 면치 못했을 것이다. 아들 역시 아버지처럼 살고 싶지 않다. 김 부장은 자신이 다니는 대기업 인턴 자리에 아들을 밀어넣지만, 아들은 거부한다. 식당에서 실수를 저지른 김 부장이 오히려 종업원을 탓하며 "내가 여기 팔아준 게 얼만데?"라고 하자, 큰소리 떵떵 치는 아버지에게 아들은 "뭐가 위대하냐? 아들이 아빠를 지금 무슨 눈으로 보고 있는지, 안 무서우세요?"라고 일침을 놓는다. 김 부장은 평생 가족을 위해 일했다. 그래서 가족의 삶에 대해 나름의 ‘지분’을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건 김 부장의 착각이다.
어느 날 김부장은 치킨을 사들고 집에 온다. 아내, 아들과 치킨을 뜯으며 오순도순 대화를 나누길 기대한다. 하지만 밤늦도록 둘은 돌아오지 않는다. 귀가 후에도 "배 안 고픈데"라고 말한다. 가족들은 김 부장의 눈치를 보며 식탁에 앉고, 치킨을 한 입 베어 문 김 부장은 "다 식었네"라고 말한다. 그 치킨이 딱 김 부장의 처지 같다.
드라마 곳곳에서 ‘김 부장 이야기’의 OST가 흐른다. 가수 이적이 부른 ‘혼자였다’다. "눈 뜨고 둘러보니 난 이미 혼자였다 / 난 어쩌면 좋겠니 세상이 더는 필요로 하지 않는다면" 이 가사처럼, 김 부장이 호기롭게 말하던 위대한 삶은 어느덧 아주 작게 쪼그라들었다.
#"나 아직 쓸모 있는 놈이라고"
눈 앞의 위기 앞에 김 부장의 지난 25년은 의미없다. 김 부장은 ACT 본사 부장 자리에서 밀려나 지방 공장으로 좌천될 위기에 놓인다. 김 부장은 백정태(유승목) 상무라는 동앗줄을 힘껏 붙잡으려 노력한다. 신입 사원 때부터 믿고 따르는 사수다. 벼락치기 영업으로 실적을 내고 자리를 지키려 한다. 백 상무를 집으로 불러 식사를 하며 단란한 시간을 보낸다. 일종의 ‘굳히기’다.
하지만 백 상무는 김 부장에게 지방 발령 소식을 전한다. 김 부장은 말한다. "내가 이 회사에서 25년 동안 어떻게 일했는지 형이 제일 잘 알잖아. 나한테 이러면 안 되는 거잖아. 나 아직 쓸모 있는 놈이라고. 나한테 어떻게 이래? 내가 뭘 그렇게 잘못을 했는데?"
안다. 김 부장도 백 상무, 그리고 이를 지켜보는 시청자들도 안다. 김 부장은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았다는 것은. 시대와 상황이 잘못됐고, 그 시대와 상황을 이겨내기 위해 누군가는 희생된다. 이번에는 김 부장이 그 차례일 뿐이다.
지방 공장에서 일하던 김 부장은 오랜 만에 서울로 올라와 백 상무와 식사 자리를 갖는다. 백 상무는 김 부장을 향해 "넌 일을 하고 있는 게 아니다. 일하는 기분을 내고 있다. 일이란 곧 책임인데, 넌 아무것도 책임지고 있지 않다. 책임지는 방법도 모른다"라고 꼬집었다. 이에 김 부장은 "내 인생 최악의 불운은 형이 내 사수였단 거다. 임원 된 기분만 내셨던 것 같아요"라고 응수했다.
결국 두 사람은 몸싸움까지 벌인다. 50대 두 남자의 몸싸움. 드라마 밖에서는 쌍방폭행죄에 해당되는 사고지만, 드라마 속에서는 한 편의 슬픈 우화다. 그저 이 정글 같은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한 때는 둘도 없는 전우였으나, 이제는 둘도 없는 원수가 돼버린 두 남자의 아우성이다.
이적은 또 노래한다. "모두가 놀리듯이 날 둘러싸며 웃지만 절대 헤어날 수가 없다면 넌 어떨 것 같니 난 이제 어떡해야만 하니"
곰곰이 생각해보면, 이 노래의 화제는 이적도, 김 부장도 아니다. 오늘도 잘 버티기 위해 아직 잠자고 있는 가족들을 뒤로 하고 조용히 집을 나서는 이 시대의 모든 가장들이 부르는 노래다.
윤준호(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