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종을 기억하는 새로운 방식, ‘왕과 사는 남자’가 택한 상상

권구현(칼럼니스트) 기자
2026.01.26 11:01

유해진

영화 왕과 사는 남자는 단종의 삶을 다룬 작품으로, 조선 6대 왕 단종의 유배지에서의 이야기를 그린다. 장항준 감독은 승자전승의 법칙으로 기록된 역사에서 패자로 지워진 단종의 모습을 재조명하며, 유해진과 박지훈이 주연을 맡아 단종의 감정 변화를 섬세하게 표현한다. 영화는 2월 4일 개봉하며 117분, 12세 이상 관람가로 상영된다.
사진제공=쇼박스

인류의 역사는 기록에서 비롯됐다. 태고적부터 자신들의 생활상을 동굴 벽에 그려냈고, 문자가 없을 땐 구전으로 후손의 머릿속에 선조의 지혜를 새겼다. 글자를 개발했고, 종이를 발명했으며, 인쇄술이라는 기술까지 익혀 끊임없이 현재를 기록해 후대에 넘겼다. 이제는 사진과 영상을 찍고, 디지털로 변환해 저장을 한다. 나아가 인류를 넘어 우주 어딘가에 있을 또 다른 생명체에게 그 기록을 송출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하지만 기록이 꼭 진실된 것은 아니다. 결국 사람 손을 타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끊임없이 타인과의 갈등 속에 살아온 인류는 결국 승자전승의 법칙으로 역사를 써왔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고 했다. 그렇게 기록 속의 승자는 미화됐고, 패자는 폄훼 혹은 삭제됐다. 애석하지만 기록에 의존하는 후대의 사람들이 역사의 진실을 정확히 파악할 길은 없다. 그저 당시의 시대상을 예측하고, 다른 기록들에 빗대어 미루어 짐작할 따름이다.

사진제공=쇼박스

영화 ‘왕과 사는 남자’(이하 왕사남, 감독 장항준, 제작 ㈜온다웍스 ㈜비에이엔터테인먼트)는 패자였기에 지워졌던 단종에 대한 상상이다. 강원도 영월 청령포로 유배 온 어린 선왕 단종, 그를 맞이하는 광천골 촌장과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린다. 단종은 조선의 6대 왕이다. 세종대왕의 세손이자, 문종의 적자였고, 세조의 조카였다. 12세에 왕위에 올랐으나 숙부 수양대군의 계유정난으로 왕위를 빼앗겼고, 17세에 목숨을 빼앗긴 비운의 왕이다.

패자였기에 지워진 단종에 대한 작품이라 의미가 깊다. 사관의 나라였던 조선은 왕의 일거수일투족을 기록했다. 덕분에 ‘조선왕조실록’이라는 세계문화유산까지 편찬했건만, 패자였던 단종의 기록은 미비했다. 후세들은 큰 업적을 세운 세종과 세조의 치세에만 관심을 뒀을 뿐, 반정으로 폐위됐던 어린 왕의 슬픔엔 시선을 두지 않았다. 허나 장항준 감독은 과거는 물론 현세에도 외면받은 단종 이홍위의 인생을 어루만진다.

사진제공=쇼박스 

폐위 이후의 서술이기에 계유정난의 치열했던 암투는 영화에서 배제된다. 폐위 된 단종 이홍위(박지훈)와 유배지를 관리하는 보수주인 엄홍도(유해진)의 브로맨스가 중심을 이룬다. 그리고 끝까지 단종을 지켰던 궁녀 매화(전미도)와 순박한 광천골 사람들이 브로맨스에 앙상블을 더한다. 죽음의 절벽 앞에 서있던 단종이 조금씩 삶의 의지를 다져가는 과정들이 아기자기하게 펼쳐진다.

‘왕사남’은 역사가 스포일러인 작품이다. 너무나 유명한 역사이기에 모두가 알고 있는 결말을 향해 서사가 진행된다. 허나 그 과정이 매우 매끄럽고, 개연성을 갖췄다. 사료가 많지 않음에도 역사적 사실들을 모아 골조를 세우고, 장 감독 특유의 상상력과 익살로 살을 붙였다. 하여 단종의 감정은 물론 태도의 변화들에 공감이 서린다. 특히 금성대군과 함께 대권을 도모하는 출사표는 영화가 전하는 가장 큰 울림이 된다.

사진제공=쇼박스 

상상을 기반으로 한 작품이기에 배우들의 연기가 지워졌던 역사에 생명을 더한다. 특히 유해진은 자신이 가장 잘하는 연기를 주무기로 꺼내 들었다. 익히 봐왔던 스타일이기에 더 이상 잘 하기도 힘들 것이라는 예상을 산산조각 낸다. 그만큼 ‘왕사남’에서 보여주는 유해진의 열연은 대단하다. ‘유해진 스타일’의 커리어 하이를 찍는다. 아직도 더 발전하고, 관객에게 더 나은 모습을 보여줄 수 있다는 것이 경이로울 따름이다.

박지훈은 캐스팅 단계부터 찰떡이란 평가를 받았다. 입을 열지 않아도 수많은 회한을 표현할 수 있는 눈빛의 소유자다. 그 누구보다 굴곡졌던 단종의 감정선을 저점부터 고점까지, 단어로는 다 표현할 수 없을 복잡한 심경을 연기로 표현한다. 덕분에 관객이 알고 있던 단종의 이미지는 박지훈의 모습으로 새롭게 마음 속에 저장된다. 어렸기에 희생됐던 유약한 단종이 아닌 백성을 사랑했고, 그래서 반정을 바로잡고자 했던 어엿한 왕 단종의 탄생이다.

사진제공=쇼박스 

전미도는 ‘슬기로운 의사생활’로 스타덤에 오른 후 첫 스크린 나들이에 나섰다. 기대에 걸맞은 연기를 펼쳤으나, 분량이 적다. 더 많은 시간을 들여 전미도의 연기를 보고 싶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이에 대해 제작진도 많은 고민을 했을 터,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품 전체를 보면 알맞은 선택이었기에 ‘왕사남’은 방향을 잃지 않고 자신들의 소중한 영화를 완성할 수 있었다.

‘왕사남’은 재미있는 영화다. 하지만 생각할 여지도 많은 영화다. 여전히 “훗날 역사가 평가할 것”이라는 말을 달고 사는 위정자들이 존재한다. 승자만 기록됐던 역사였기에 가능한 호언장담이겠다. 지금까지 우린 단종보다는 세조에 더 집중하지 않았던가, 쿠데타 위에 근대화를 써왔고, 최근까지도 계엄이라는 총부림이 있었던 대한민국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역사의 진실을, 그리고 기록의 이면을 마주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더 반가운 단종의 이야기 ‘왕과 사는 남자’다.

영화 ‘왕과 사는 남자’는 오는 2월 4일 개봉한다. 117분. 12세 이상 관람가.

권구현(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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