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직함이 재능이라는 사실은 배우 남지현을 보면 알 수 있다. 전작 ‘굿파트너’(2024)에서 팬들의 신임을 톡톡히 얻은 남지현이 현재 방영 중인 KBS2 주말극 ‘은애하는 도적님아’(극본 이선, 연출 함영걸)에서 다시 한 번 그 재능을 뽐내고 있다.
‘은애하는 도적님아’는 낮에는 의녀지만 밤에는 의적이 되는 여인과 그를 쫓던 조선의 대군이 어쩌다 영혼이 서로 바뀌면서 서로를 구원하고, 종국에는 함께 백성을 구하려 나서는 판타지 로맨스 사극. 남녀 주인공의 영혼이 바뀐다는 판타지 설정 때문에 요절복통 코미디가 있을 것 같지만, 오산이다. 이 드라마에서 영혼 체인지는 극의 다이내믹을 더 크게 만드는 장치일 뿐, 코믹한 재미는 추구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어떤 판타지 사극보다 비장미가 있다.
특히 남지현이 그리는 여주인공 홍은조는 양반 아버지와 천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얼녀’라는 출생의 한계, 그리고 가족의 생계를 위해서 혜민서 의녀로 일하며 자신의 삶은 한없이 뒤로 미루는 소녀가장의 운명까지 짊어졌다. 밤에는 어려운 이웃들을 돕기 위해 양반의 곳간을 터는 이중생활을 한다. 이 모든 걸 은조가 홀로 감당해야 한다는 점에서 시청자들이 자칫 인물을 과도하게 비장하게 바라보게 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남지현은 끝내 은조를 무겁게 만들지 않는다. 더 정확히 말하면, 남지현은 은조의 어깨에 드리워진 삶의 무게를 숨기지 않되 그 무게를 시청자들에게 떠넘기지 않는다. 결연해야 할 순간에도 과장되지 않고, 단단해야 할 장면에서도 힘을 과시하지 않는다. 차갑게 날 선 결기가 아니어도 굳건하게 인물을 세울 수 있는 특별한 힘이 남지현에게는 있다.
사실 그 무게가 시청자들을 무겁게 짓누르지 않는 이유는 은조의 삶의 태도에서 비롯된 까닭이기도 하다. 은조의 선택은 비극적 희생이 아니라 그가 기꺼이 받아들이는 삶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남아있을 수 있는 불편한 감정이 있다면 이마저도 남지현이 말끔히 털어낸다. 남지현은 말간 얼굴로 인물의 고단한 서사를 담담하게 전달하는 동시에, 특유의 믿음직함을 살포시 내비치며 팬들을 안심시킨다.
남지현의 강점은 바로 이 지점에서 더욱 뾰족하게 드러난다. 남지현은 갈등이 증폭되고 감정이 격해지는 사건들이 아니라, 그저 삶을 마주하는 태도를 고요히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자신의 존재감을 폭발한다. 이러한 남지현의 연기는 영혼 체인지 설정에서 더욱 또렷해진다. 이중생활을 하는 은조가 도월대군 이열의 영혼까지 품게 되면서 남지현이 한 얼굴로 여러 결의 인물을 표현해야 하는데, 결코 연기에 힘을 주는 모습이 없다.
상황별 캐릭터를 달리 보여주기 위해 연기가 설정의 설명으로 전락하거나, 변화 자체를 강조하는 데 그칠 위험도 있지만 남지현은 그러한 오류에 빠지지 않는다. 무엇보다 남지현은 이 장치를 기교의 무대로 삼지 않는다. 각 상태를 명확히 구분하면서도 부풀리지는 않는다. 말투나 몸짓을 과장하지 않고, 미묘한 결의 변화를 보여준다.
나아가 남지현이 표현하는 은조는 현실에 발붙인 존재로서 ‘잘 연기된 캐릭터’가 아니라 신뢰할 수 있는 인간 그 자체로 시청자들에게 다가간다. 따뜻한 성정으로 여기저기 도움을 주려 오지랖을 부리는 모습 역시 유난스러워 보이기보다는 든든하고 고마운 마음을 갖게 한다. 남지현이라는 배우의 인간적이고 믿음직한 매력이 가능하게 만든 장면들이다. 그렇기에 최근 방송에서 역모를 도모하고 새로운 왕을 세우는 데 힘을 보태기로 결심하는 은조의 선택은 영웅적으로 소비되지 않는다.
또한 은조는 이열과의 로맨스 감정도 시청자들에게 굳이 펼쳐보이지 않는다. 자신의 어깨에 드리워진 무게를 시청자에게 전가하지 않듯 사랑의 감정 역시 시청자들이 서사를 따라가는 데 필요한 만큼 내비치고 만다. 이러한 단정한 로맨스를 남지현은 차분하고 균형감 있는 연기로 그려낸다. 감정을 앞세우는 관계가 아니라 인물 간 믿음을 쌓여가는 과정을 로맨스라는 이름으로 보여준다.
이렇듯 복잡한 이야기에도 과도한 감정 과잉 없이 절제된 연기로 흡인력을 보여주는 남지현이 있어서 시청자들도 ‘은애하는 도적님아’를 믿고 따라가게 된다. 이제 종영까지 단 4회만 남은 가운데 남지현을 향한 믿음으로 드라마를 완주하겠다는 팬들의 목소리는 더 높아지고 있다. 지난 12일에는 시청률이 7.3%(닐슨미디어 집계)로 자체 최고 기록을 작성했다.
결국 ‘은애하는 도적님아’에서 남지현의 존재감은 신뢰감으로 수렴된다. 한동안 부진에 허덕대던 KBS 안방극장에 단비 같은 인기작을 선사했다는 점에서도 신망 높은 남지현의 입지는 더욱 공고해진다. 뿐만 아니라 ‘백일의 낭군님’(2018) 이후 또 한 번 사극 로맨스로 흥행을 기록하며 ‘사극 불패’라는 믿음도 추가하는 남지현이다.
조성경(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