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블 피로도를 씻어낸 뜻밖의 수작 ‘원더맨’

정유미(칼럼니스트) 기자
2026.03.01 09:30
원더맨은 마블의 여섯 번째 페이즈 드라마로, 슈퍼히어로 오디션에 참가하는 배우 사이먼과 연기 멘토 트레보의 브로맨스를 그린 블랙 코미디 작품이다. 마블의 인기 빌런 제모 남작과 가짜 만다린 역할을 했던 트레보가 등장하며, 할리우드와 히어로 영화를 풍자한다. 아쿠아맨의 야히아 압둘마틴 2세가 주연을 맡아 연기력을 선보였으며, 감독 데스틴 대니얼 크레턴과 작가 앤드류 게스트가 총괄 제작을 맡았다.
사진제공=디즈니

질문으로 시작한다. 가장 최근에 나온 마블 영화 제목을 기억하는가? 아니면 디즈니플러스에서 공개되는 마블 시리즈를 챙겨 보고 있는가? 지난해 개봉한 마지막 마블 영화가 ‘썬더볼츠*’인지 ‘판타스틱 4’인지 헷갈린다고? 지난해 공개된 시리즈 ‘데어데블: 본 어게인’과 ‘아이언하트’는 못 봤다고? 그렇다면 인정하자.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MCU)는 더 이상 관심사가 아니라고 말이다.

한때 MCU의 사가와 페이즈를 꼼꼼히 따져가며 관람하던 시절이 있었다. ‘어벤져스’와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가 활약한 인피니티 사가(2008년~2019년)는 명실상부 마블의 전성기였다. 멀티버스 사가(2021년~2027년)가 막을 올렸을 때만 해도, 아이언맨의 빈자리를 채울 히어로들을 영화와 드라마로 만날 수 있다는 기대에 부풀었다. 하지만 작품 수가 늘면서 이야기와 완성도에 한계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드라마를 봐야만 영화를 이해할 수 있는 높은 장벽과 과도한 멀티버스 확장은 결국 마블 팬들의 피로도만 높이는 결과를 불러왔다.

마블을 향한 기대와 관심이 예전 같지 않은 상황에서 MCU는 어느덧 여섯 번째 페이즈에 접어들었다. 마블 영화는 지난해 ‘판타스틱 4: 새로운 출발’로 시작해 올해와 내년 ‘스파이더맨’ 4편과 ‘어벤져스’ 5편과 6편을 연달아 내놓으며 돌아선 팬들의 마음을 다시 되돌릴 계획이다. 그리고 이번 페이즈6의 첫 드라마가 바로 ‘원더맨’이다. 처음 듣는 히어로 이름이라고? 하지만 이 드라마를 보고 나면 그 이름을 잊지 못할 것이다. “마블이 실수로 잘 만든 것 아니냐”는 농담이 나올 만큼 ‘원더맨’은 그간 쌓인 마블에 대한 피로감을 말끔히 씻어주는 수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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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블 코믹스 ‘어벤져스’(1964)에 처음 등장한 원더맨은 무려 60년이 넘는 역사를 지닌 캐릭터다. 본래 아버지의 기업을 물려받아 운영하던 사이먼 윌리엄스는 ‘아이언맨’ 토니 스타크의 기업과 경쟁하던 중, 형 에릭(빌런 ‘그림 리퍼’)의 꼬임으로 위기에 빠진다. 이때 마블의 유명한 빌런인 제모 남작(Baron Zemo)에게 도움을 받은 사이먼은 그의 이온광선 실험을 통해 초능력을 얻는다. 제모의 의도대로 어벤져스를 공격하는 빌런으로 투입되었다가, 우여곡절 끝에 정의를 택하며 어벤져스의 일원이 된 드라마틱한 서사의 소유자다.

드라마 ‘원더맨’이 코믹스 원작을 그대로 답습했다면 지금만큼의 흥미를 끌지는 못했을 거다. 제작진은 (다음 시리즈에 등장할 가능성이 농후한) 제모 남작이나 원작에서 연인 관계였던 스칼렛 위치가 등장할 것이라는 팬들의 기대를 기분 좋게 배반한다. 대신에 주인공 사이먼(야히아 압둘마틴 2세)을 할리우드 스타를 꿈꾸는 단역 배우로 설정하는 과감한 승부수를 던졌다.

‘원더맨’ 1화는 낯설고도 흥미롭다. 인기 드라마 ‘아메리칸 호러 스토리’ 촬영장에서 진지하게 배역을 분석하고, 히어로 영화 ‘원더맨’ 오디션에 참가하는 주인공을 보며 시청자들은 공통된 의문에 빠질 것이다. ‘이게 정말 마블 드라마가 맞아? 주인공은 슈퍼파워를 지닌 히어로가 맞긴 한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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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한술 더 뜨는 캐릭터가 등장한다. 트레보 슬래터리, 이름만 듣고 고개가 갸우뚱할 시청자도 만다린이라고 하면 무릎을 칠 것이다. 그는 ‘아이언맨 3’(2013)에서 테러리스트 만다린을 연기한 가짜 배우로 처음 등장해, ‘샹치와 텐 링즈의 전설’(2021)에선 웬우(양조위)의 지하 감옥에 갇혀 있다가 샹치 일행을 돕는 감초로 활약했던 인물이다. 대배우 벤 킹슬리가 연기하는 트레보는 이번 ‘원더맨’에서 과거에 ‘만다린 대역’을 했던 전력 때문에 사이먼에게 접근한다. 처음엔 사이먼이 정말 슈퍼파워를 지닌 인물인지 정보를 수집하려는 목적이었지만, 연기에 진심인 사이먼의 모습에 트레보의 마음은 흔들리기 시작한다.

사이먼과 트레보는 배우라는 공통분모로 급속도로 가까워진다. 연기에 목마른 사이먼에게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읊조리는 연기 선배 트레보는 더할 나위 없는 멘토가 되어주고, 가짜 만다린 행세로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트레보에게 성공이 간절한 외톨이 사이먼은 기꺼이 돕고 싶은 소중한 후배다.

‘원더맨’은 둘의 브로맨스를 코믹하게 그리면서도, 할리우드와 히어로 영화에 대한 풍자를 담아낸다. 슈퍼히어로 리메이크작인 ‘원더맨’ 오디션에 참가한 사이먼과 트레보 그리고 다른 배우들과 괴짜 감독이 벌이는 한바탕 소동극은 압권이다. “재능 있는 사람이 널리고 널린” 할리우드에서 배우와 창작자가 진정으로 추구해야 할 가치가 무엇인지 작품 스스로 묻는 듯하다.

사진제공=디즈니

드라마 ‘원더맨’은 전형적인 슈퍼히어로 액션에서 벗어나 할리우드를 배경으로 한 블랙 코미디로 장르 변주를 꾀한다. MCU 세계관 속 할리우드의 뒷모습을 엿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사이먼이 오디션 영상을 준비하는 2회 ‘셀프 테이프’와, 슈퍼파워 소유자의 작품 출연을 제한하는 ‘도어맨’ 조항을 다룬 4회 ‘도어맨’이 대표적이다. 두 편에선 ‘매트릭스’의 배우 조 판토리아노와 ‘겨울 왕국’의 올라프 목소리로 유명한 조시 게드가 본인 역으로 출연해 능청스러운 카메오 연기를 펼친다. 7화 ‘캐시 프리드먼’에선 유명 언론사 기자를 ‘배우 흠집 내기 전문가’라고 비꼬며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이면을 풍자하기도 한다.

MCU에 합류한 원더맨은 슈퍼파워보다 연기력으로 먼저 합격점을 받아낸다. ‘아쿠아맨’에서 블랙 만타 역으로 출연한 야히아 압둘마틴 2세는 ‘원더맨’에서 배우로 성공하기 위해 역설적으로 자신의 초능력을 숨겨야만 하는 히어로를 연기했다. 특히 극 중 연기 연습과 오디션 장면에서 보여준 강도 높은 열연은 실제와 연기의 경계를 허물며 배우의 진가를 드러낸다. 원작에서 어벤져스와 깊은 접점이 있는 만큼, 그의 향후 MCU 영화 출연 가능성도 높아 보인다. 여기에 ‘가짜 만다린’과 ‘배우 트레보’ 사이를 자유자재로 오가며 연기론을 펼치는 벤 킹슬리의 감쪽 같은 연기는 경외감마저 불러일으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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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더맨’은 ‘샹치와 텐 링즈의 전설’ 데스틴 대니얼 크레턴 감독과 드라마 ‘브루클린 나인-나인’ ‘커뮤니티’의 작가 앤드류 게스트가 총괄 제작을 맡았다. 이 기발한 크리에이터들은 ‘슈퍼히어로 영화 오디션에 참가한 초능력자’라는 신선한 설정 위에 묵직한 액션과 ‘티키타카’ 코미디를 산뜻하게 버무려냈다. 그 결과, 기존 마블 히어로 시리즈의 틀을 깨는 개성 넘치는 히어로물이 탄생했다.

마지막 8회 ‘유카밸리’는 배우이면서 슈퍼히어로인 원더맨의 정체성을 완성하는 완벽한 피날레다. 배우라는 목표를 향해 하루하루 열심히 노력하는 히어로의 성장기, 그리고 한때 빌런 연기로 세상을 속였던 노배우의 참회를 이토록 아름다운 우정담으로 엮어낼 줄 누가 알았을까. 마블 시리즈의 명예 회복은 물론, 히어로 서사의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린 ‘원더맨’ 시청을 강력히 권한다. 연기와 인생을 가르쳐주는 마블 시리즈라니, 이보다 반가운 귀환이 어디 있겠는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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