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드라마 생태계에서 로맨스 장르를 시즌제로 이끌어간다는 것은 일종의 모험이다. 더구나 매 시즌 남자 주인공이 바뀌는 구조라면 그 위험 부담은 배가된다. 대중은 대개 '주인공 커플의 완성'을 기대하며 로맨스 서사에 탑승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티빙 오리지널 '유미의 세포들'은 장장 세 번의 시즌을 거치며 흔들림 없이 순항 중이다. 구웅(안보현), 유바비(박진영), 그리고 새로운 순록(김재원)에 이르기까지. 파트너가 바뀌는 와중에도 시청자들은 기꺼이 유미(김고은)의 다음 연애를 응원하고 있다. 그 중심에는 매 시즌 서사와 감정선을 단단히 붙든 김고은이라는 거대하고 단단한 구심점이 있다.
'유미의 세포들'의 가장 큰 특징이자 위험 요소는 3D 애니메이션(세포들)과 실사의 결합이다. 머릿속 세포들이 제아무리 다채로운 감정의 스펙트럼을 보여준다 한들, 현실 세계에 발을 딛고 있는 주인공의 연기가 붕 뜨거나 과장되면 극 전체가 유치한 촌극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
김고은은 특유의 자연스럽고 담백한 생활 연기로 이 아슬아슬한 경계를 완벽하게 지켜냈다. 눈이 얼굴의 절반을 차지하는 원작 웹툰 속 유미의 비현실적인 외모를 흉내 내는 대신, 그는 직장과 일상에서 치이는 30대 여성의 보편적인 피로감과 설렘을 자신만의 말간 얼굴에 투영했다. 시즌3 초반 작가로 성공했지만 일상이 무미건조해져 희로애락 세포들이 모두 잠들어버린 유미의 공허한 상태를 표현할 때, 감정을 덜어낸 건조한 눈빛과 호흡만으로 시청자들을 단숨에 4년 뒤의 유미 세계로 소환해 냈다.
시즌1과 2를 거치며 사랑과 이별, 커리어의 성장을 겪은 유미는 시즌3에 이르러 확연히 다른 태도를 취한다. 과거 상대방의 감정에 휩쓸리거나 불안해하던 소극적인 모습에서 벗어나 이제는 자신의 감정을 직시하고 행동을 선택할 줄 아는 성숙한 어른이 된 것이다.
김고은은 이러한 유미의 성장을 자연스럽게 담아낸다. 철저히 '공사구분'을 하며 선을 긋는 저전력 모드의 순록에게 "같이 영화 보실래요?"라고 먼저 용기내 다가가는 장면이나, 주호(최다니엘)의 간섭으로 인해 생겨난 순록과의 미묘한 오해 앞에서도 섣불리 감정을 터뜨리기보다 상황을 관망하는 여유는 지난 두 번의 뼈아픈(?) 연애를 통해 단단해진 유미의 서사를 김고은 스스로가 온전히 체화했기에 가능한 연기다. 우산을 나눠 쓰며 순록의 진심을 깨달을 때의 미세한 표정 변화는 김고은이 '로맨스 텐션'을 조율하는 데 얼마나 탁월한 장인인지 다시금 증명한다.
타이틀롤로서 김고은이 가진 힘 중 하나는 혼자 튀려 하지 않고 상대를 빛나게 하는 넉넉한 품을 지녔다는 점이다. 시즌1의 안보현, 시즌2의 박진영이 이 작품을 통해 자신의 매력을 200% 발산하며 대세로 자리 잡았듯, 시즌3의 김재원 역시 김고은이라는 든든한 캔버스 위에서 마음껏 뛰어놀고 있다.
차갑고 무뚝뚝해 보이지만 사실은 에너지가 방전되어 멍을 때리는 순록의 엉뚱함은, 그 앞에서 당황하고 때로는 분노하며 타율 좋게 리액션을 받아치는 김고은이 있기에 귀여운 매력이 된다. 순록이 원칙을 깨고 유미에게 "좋아하는 것 같아요"라고 각성하며 고백하는 장면의 짜릿함 또한, 그 이전까지 김고은이 차곡차곡 쌓아 올린 설렘과 실망의 교차점들이 튼튼한 밑거름이 됐기에 가능했다.
천만 영화 '파묘'의 카리스마 넘치는 무당, '자백의 대가'의 서늘하고 처연한 살인마로 강렬한 장르적 에너지를 보여준 김고은은 '유미의 세포들'에서는 다시 우리 곁에 있을 법한 평범한 유미가 된다. 그는 세 번의 시즌 동안 유미의 사랑과 이별, 망설임과 성장을 흔들림 없이 이끌며 작품의 중심을 지켰다. 유미의 매 순간을 설득력 있게 쌓아 올리며 시청자에게 '유미의 사랑이 곧 나의 사랑'이라는 깊은 공감을 안겼다. 이는 어떤 화려한 연기 변신 못지않게 값진 성취다. 대중의 예상을 매번 새롭게 갱신해 온 김고은의 커리어 하이는, 유미의 세포들이 끝없이 증식하듯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