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영화 ‘오디세이’가 개봉 2주차를 맞이하면서 관람 열기가 더욱 끌어 오르고 있다. 첫 주에는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스파이더맨: 브랜드 뉴 데이’에 비해 근소한 차로 관람객 우위를 점하는가 싶더니, 둘째 주부터는 그 격차를 하루 10만 명 이상으로 벌리고 있다. 그리고 개봉 12일째인 16일엔 드디어 400만 관객을 돌파하며 흥행 독주 체제를 굳혔다. 누적 예매 관객도 개봉 초기보다 훨씬 늘어난 100만 명이나 된다. 극장가 주요 관객층인 2030 세대는 물론 4050 세대까지 스크린에 몰린다고 하니 1000만 관객 흥행을 기대해봄 직하다.
‘오디세이’는 지금으로부터 3000년 전 고대 그리스의 시인인 호메로스의 서사시 ‘오뒷세이아’를 원작으로 하고 있다. 이타카의 왕 오디세우스(맷 데이먼)가 트로이 전쟁이 끝난 뒤 고향으로 돌아가는 멀고 험난한 여정을 그린 작품이다. 신화와 전설이 지배하던 시대이니, 귀향의 여정은 기가 막힌 판타지 드라마의 연속이다. 실로 기묘한 괴물이 등장하고, 비현실적인 사건들이 펼쳐진다. 외눈박이 거인, 노래로 뱃사람을 유혹하는 세이렌, 죽은 영혼들의 세상 등 상상을 뛰어넘는 이야기들이다.
슈퍼히어로물의 리부트, 인간의 기억과 시간, 우주의 신비, 전쟁의 참상 등 다양한 소재와 주제를 넘나들었던 놀란 감독의 차기작으로서 '오디세이'는 손색이 없어 보인다. 그러나 알려졌다시피 디지털과 컴퓨터그래픽(CG)을 잘 사용하지 않는 ‘아날로그’ 감독의 선택치곤 다소 의외다. 우주 SF를 뺨치는 환상과 초현실이 난무하는 신화 속 영웅담을 그는 과연 어떻게 만들게 됐을까. 이를 통해 무엇을 말하고 싶었을까.
◇철저한 대중성에 기반을 둔 철학적 판타지
놀란 감독의 성장 과정에서 그 싹이 엿보인다. 그는 광고기획자였던 아버지와 항공기 승무원이었던 어머니의 영향으로 영국과 미국을 오가며 성장했다. 미국 시카고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고, 대학은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으로 진학했다. 그는 어려서부터 영화에 관심이 많았다. 세계적으로 흥행에 성공했던 할리우드의 ‘스타워즈’나 ‘레이더스’는 물론 대중성과 예술성을 겸비했다고 여겨지는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 등을 즐겨봤다. 대학에서도 전공인 영문학보다는 교내 영화 동아리 활동에 더 열중했다. 그래서 재학 때부터 영화 현장의 카메라 기사로 활동했고, 졸업 후인 1998년 장편 ‘미행’으로 연출 데뷔했다. '미행'은 제작비 6000달러에, 20대 무명 감독의 작품이었으나 참신한 아이디어로 가능성을 인정받았다.
놀란 감독은 평소 자신이 영향받은 감독이나 작품에 대해 주저 없이 언급한다. 스탠리 큐브릭, 알프레드 히치콕, 리들리 스콧, 스티븐 스필버그, 테런스 맬릭, 데이비드 린, 잭 스나이더, 마이클 베이 감독 등이다. 이들의 어떤 작품이 좋았는지, 그들의 작품을 보면서 어떤 힌트를 얻었는지, 어떻게 오마주를 했는지 등을 숨기지 않는다. 설령 자신과 스타일이 다르더라도 인상 깊은 스토리나 촬영 방식에 대해서는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일부 감독이 자존심이나 독창성 때문에 다른 감독의 이름이나 작품을 꼽기를 꺼리는 것과는 전혀 다른 태도다.
언급된 창작자들의 이름만 들어도 놀란 감독의 작품 성향이 읽힌다. 단지 작품성이나 예술성에만 매달리기보다는 철저히 현실적이고 대중적인 감각에 뿌리를 둔 판타지를 선호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그는 2011년 칸국제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인 테런스 멜릭 감독의 ‘트리 오프 라이프’가 연상되는 장면을 ‘인터스텔라’(2014)에 삽입했고, SF 판타지의 실질적 원조로 꼽히는 리들리 스콧 감독의 ‘블레이드 러너’(1982)를 참고하면서 ‘배트맨 비긴즈’(2005)를 제작했다. 시간을 다룬 기묘한 첩보물 ‘테넷’(2020)도 실은 청년시절부터 좋아했던 ‘007 시리즈’의 연장선이며, 연출 스타일은 다르지만 ‘진주만’(2001) ‘트랜스포머’(2007)를 만든 마이클 베이 감독의 열혈팬이다. 그는 "성찰과 고민이 묻어나는 작품들은 관객들의 감정을 어떤 방식으로든 자극시킨다"면서 영화라는 매체의 완성을 위해서라면 이념도, 성향도 굳이 따지지 않는 유연함을 보여줬다.
◇아날로그 장인정신…10억 달러 흥행의 원동력
놀란 감독은 1998년 장편 데뷔 이후 지난 28년간 13편의 작품을 연출했다. 약 2년에 1편꼴이다. 쉬운 CG를 놔두고 어려운 촬영기법을 고집하는 감독의 작품 생산 주기로는 가히 놀라운 속도다. 워커홀릭이라는 뜻이다.
2023년 개봉한 ‘오펜하이머’를 제작할 때에도 그의 ‘장인정신’은 이어졌다. ‘오펜하이머’는 그가 커리어 처음으로 연출한 전기영화다. 세계 최초로 핵무기를 개발한 과학자 줄리어스 로버트 오펜하이머의 일대기를 그리는 데 있어서 핵폭발 장면은 가장 중요한 요소였다. 그런데 놀란 감독은 이를 CG 없이 구현했다. 뉴멕시코 사막에 세트를 짓고, 휘발유·알루미늄 분말·화약·마그네슘 불꽃 등 화학 혼합물을 동원해 실제 폭탄을 제작한 후 터뜨렸다. 단 한번의 실수도 용납할 수 없는 모험적 촬영이었는데 기꺼이 도전했다.
흥행 질주 중인 ‘오디세이’도 마찬가지다. 영화에 등장하는 키 18m의 외눈박이 괴물 키클롭스는 기계식 인형으로 제작했다. 마리오네뜨 인형(줄이 달린 관절 인형)처럼 만든 후 동작을 제어하면서 인간 대역의 연기를 그 위에 입힌 것이다.
물론 놀런 감독도 CG를 완전히 배제하지는 않는다. 다만, 아날로그 촬영으로 최대한의 원천 소스를 확보한 후 후보정용으로 CG를 활용한다. 그는 CG를 최소화하는 이유에 대해 "너무 안전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라고 했다. 실제로 촬영한 아날로그 이미지가 관객에게 주는 현실감을 CG가 대체하기는 어렵다고 믿고 있어서다.
CG뿐만이 아니다. 놀란 감독은 촬영 현장에서 2가지를 금기시한다. 하나는 흡연, 다른 하나는 휴대폰이다. 주의가 산만해진다는 이유 때문이다. 그 자신도 평소 스마트폰 대신 작은 2G폰을 사용한다. 이메일을 쓰지 않고 유선 전화로 통화하는 걸 선호한다. 배우들에게 각본을 줄 때도 이메일보다는 직접 대면 미팅을 하는 걸 좋아한다고 한다. 심하다 싶을 정도로 스마트폰을 멀리하는 데에도 비슷한 이유를 찾을 수 있다. 만약 스마트폰이 있었다면 심하게 중독됐을 것이며, 자신이 소중하게 여기는 자투리 시간을 잃게 됐을 것 같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유별난 고집으로 놀란 감독은 결국 대중성뿐아니라 작품성도 인정받았다. 2024년 '오펜하이머'로 제96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과 감독상을 포함해 7개 부문을 휩쓸었다. 그리고 ‘다크 나이트 라이즈’(2012)와 ‘오디세이’로는 10억 달러 이상의 대대적인 흥행 수입을 올렸다.
놀란 감독이 평소에 어김없이 지키는 또 하나의 고집이 있다. 바로 촬영현장에서도 양복을 입는 것이다. 자유분방한 분위기의 현장에서 양복 착용은 오히려 어색해 보인다. 하지만 그는 현장 스태프에 대한 존중의 의미로 수트를 걸친다. 또한 양복을 입으면 출근할 때 옷장 앞에서 옷을 고르는 시간도 아낄 수 있다고 믿는다. 모든 사고와 행동 방식이 지독할 정도로 영화에 초점 맞춰져 있다는 생각이 든다. 다른 부수적인 팩트는 최소화하고 대신 영화 제작에 올인하는 장인 정신이 오늘의 그를 만들었에 틀림없다. 3000년 전의 호메로스는 웅장한 스토리를 서사시로 읊었지만, 그는 영상에 담아 전 세계 관객들에게 전하고 있다. 그야말로 21세기의 호메로스가 아니고 누구일까.
이설(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