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몰 기한 도래로 연장 혜택을 받은 서울시 정비사업장 가운데 약 24%는 연장 이후에도 몇년 간 사업이 지연되며 다시 일몰 위기에 놓인 것으로 나타났다. 일몰제가 사업 속도와 정상화로 이어지지 않으면서 일몰제의 실효성에 의문이 제기된다.
21일 정비업계에 따르면 현재 서울시 정비사업장 가운데 일몰 기한이 도래해 과거 한 차례 연장 신청을 한 사업장은 모두 34곳에 달한다. 이 가운데 8곳(23.5%)은 연장 이후에도 2~3년간 사업이 원활히 진행되지 않아 올해 하반기부터 다시 일몰 기한이 돌아온다. 법제처 유권해석상 일몰 연장은 1회에 한해 허용되는데 연장 이후에도 사업 지연이 반복되면서 제도가 사업 정상화를 유도하기보다는 시간을 벌어주는 수단으로 작동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정비사업 일몰제는 재건축·재개발 구역이 지정된 이후 조합 설립, 사업시행인가 등 핵심 단계에 이르지 못하고 장기간 표류할 경우 정비구역 지정을 해제하도록 한 제도다. 사업성이 없거나 추진 의지가 부족한 구역을 정리해 재산권을 보호하고 도시 관리의 효율성을 높이려는 취지로 도입됐다. 그러나 기한이 지나도 아무런 행정 조치가 이뤄지지 않거나 기한 직전 형식적인 절차만 밟아 일몰 적용을 피하는 사업장이 나오는 등 나쁜 관행이 반복되고 있다.
서울 서초구 방배신삼호아파트 재건축 사업장은 이러한 현실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방배신삼호는 과거 한 차례 정비사업 일몰 연장을 신청해 유예를 받았지만 지난해 해당 유예 기한이 만료됐다. 그럼에도 현재까지 정비구역 해제나 추가적인 행정 절차는 이뤄지지 않은 상황이다. 최근 이 사업장은 시공사 선정 과정에서 난항을 겪고 있으며 이 문제가 장기화될 경우 사업시행인가 자체가 불투명해질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북가좌6 주택재건축정비구역은 지난 2023년 4월 16일 1회 연장 후 지난 2025년 4월 정비사업 만료시점을 지났지만 그대로 유지되다 지난해 11월 통합심의로 넘어가 일몰 해제 위기에서 벗어났다. 법과 원칙대로라면 일몰제 적용 검토, 해제 논의가 이뤄져야 하지만 행정은 사실상 '무대응 상태'를 유지한 것이다.
실질적인 사업 진척보다는 형식적인 요건 충족으로 일몰 피하기에 급급한 정황도 있다. 송파구 극동가락아파트 재건축 사업장은 2023년 한 차례 연장했지만 사업은 제자리 걸음을 하다 지난해 6월 두번째 연장 위기를 맞았따. 그러나 일몰 기한 직전 부랴부랴 사업시행인가 서류를 제출한 것으로 전해진다.
정비구역이 일몰제로 해제될 경우 그 파장은 결코 작지 않다. 각종 도시계획상 혜택은 무효화되고 이미 투입된 비용은 조합과 주민들의 부담으로 남는다. 민원 폭증과 행정 부담으로 이어지는 만큼 일몰제를 엄격히 적용하지 않고 사업을 유지해 주는 쪽으로 기울게 된다는 지적이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구제 방안이나 정비구역 해제 기준은 명확히 적용되지 않아 불확실성만 떠안게 된다.
최근 정비사업에 속도를 내고 있는 서울시는 이러한 혼선에 대해 한 발 물러선 입장을 보이고 있다. 서울시 관계자는 정비사업 일몰제와 관련해 "일몰제는 적용 여부는 기본적으로 자치구 소관이고 구제 방안 마련은 법령 개정이 필요한 문제인 만큼 시의 행정 영역 밖"이라고 말했다.
정비사업 일몰제가 현장에서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배경에는 여러 제도적 요인이 중첩돼 있다. 처음부터 일몰제 적용 대상에서 빗겨서 있는 아파트지구가 대표적이다. 재건축과 재개발을 구분하지 않고 동일한 기준을 적용하는 구조 역시 혼란을 키우고 있다. 제도는 있지만 적용 기준은 제각각인 상황에서 일몰제의 실효성에 대한 의문이 커지고 있다.
◆ '아파트지구' 일몰제 밖에서 출발한 제도적 예외
아파트지구는 일몰제의 사각지대를 만든 대표적인 제도적 예외다. 정비사업 일몰제는 장기간 사업이 진척되지 않을 경우 정비구역을 해제해 재산권 침해를 막겠다는 취지로 도입됐지만 아파트지구로 지정된 지역은 애초부터 일몰제 적용 대상에서 빠져 있다.
27일 정비업계에 따르면 압구정, 반포, 잠실, 여의도 등 서울 주요 재건축 단지 10곳이 현재 '아파트지구'로 지정돼 있다. 아파트지구는 1970~1980년대 주택 공급 확대를 위해 대규모 아파트 단지를 중심으로 지정된 도시계획상 용도지구로 정비구역과 달리 지정 이후 별도의 유효기간 없이 지구 해제 전까지 효력이 유지된다.
정비사업 일몰제는 정비구역 운영을 관리하기 위한 제도인 반면 아파트지구는 도시계획 차원의 용도지구로 법적 위계가 더 상위다. 이 때문에 두 제도가 충돌할 경우 아파트지구의 효력이 우선 적용되며 결과적으로 아파트지구로 지정된 지역은 일몰제 적용 대상에서 빠지게 됐다. 이로 인해 동일한 재건축 사업임에도 어떤 곳은 일몰제 적용을 받고 어떤 곳은 아예 논의 대상에서 제외되는 혼란이 발생하고 있다.
다른 아파트 밀집 지역과 차별성이 사라진 지금 아파트지구는 존재 의미마저 거의 사라진 상황이다. 서울시는 이미 신규 아파트지구 지정을 중단하고 지구단위계획으로 전환해나가고 있다. 하지만 아파트지구를 근거로 조합이 설립된 재건축 단지들은 여전히 이름을 유지하고 있다. 제도는 사라졌지만 효력은 남아 있는 구조다.
업계 관계자는 "아파트지구를 근거로 조합을 설립 승인한 경우 아파트지구를 해제하면 그동안 추진된 사업이 다시 원점에서 출발하게 돼 조합은 물론 사회적 손해도 발생하게 되는 기형적 구조"라며 "일몰제가 현장에서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이유가 제도 운영의 문제가 아니라, 출발선부터 다른 적용 구조에 있다"는 평가다.
◆ 재건축·재개발 일괄 적용…다른 사업을 같은 잣대로
재건축과 재개발을 구분하지 않고 동일하게 적용하는 구조도 문제다. 두 사업은 정비구역 지정 이후 재산권 제한의 성격부터 차이가 나타나지만 일몰제 적용에서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 업계에서는 재건축 사업장에 일몰제를 일괄 적용할 경우 기한 도래 때마다 불필요한 혼란과 행정 공백만 반복된다는 지적이 나온다.
재개발의 경우 정비구역으로 지정되는 순간 개별 건축주의 개발행위가 제한된다. 단독주택이나 연립주택, 상가 소유자는 소규모 증·개축이나 다가구주택 신축을 통한 임대 수익 창출이 불가능해지는 것. 이 때문에 사업이 장기간 지연될 경우 재산권 침해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
정비업계 관계자는 "재개발 지역은 정비구역으로 묶이는 순간 사실상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상태가 된다"며 "사업이 수년째 멈추면 그 기간 동안의 손실은 개인이 고스란히 떠안게 된다"고 말했다. 이에 재개발 사업은 일정 기간마다 사업 지속 여부를 점검하고 해제를 검토하는 일몰제 취지가 들어맞는다는 평가다. 실제 일몰제 적용 이후 실제 정비사업이 해제된 사업장은 재개발 구역에서만 나왔다.
반면 재건축은 기존 아파트를 철거하고 다시 아파트를 짓는 사업이다. 아파트 한채를 보유한 상태에서 개별 소유자가 선택할 수 있는 개발 행위는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정비구역으로 묶이지 않았다고 해서 별도의 개발이 가능한 것도 아니다. 다른 업계 관계자는 "재건축은 조합을 통해 함께 가거나 아니면 아무것도 못 하는 구조"라며 "재개발과 동일한 기준으로 일몰제를 적용하는 것은 현실과 맞지 않는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