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님은 왕" 구광모가 맞았다

심재현 기자
2021.12.24 05:10

[우리가 보는 세상]

[편집자주] 뉴스현장에는 희로애락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기사로 쓰기에 쉽지 않은 것도 있고, 곰곰이 생각해 봐야 할 일도 많습니다. '우리들이 보는 세상(우보세)'은 머니투데이 시니어 기자들이 속보 기사에서 자칫 놓치기 쉬운 '뉴스 속의 뉴스', '뉴스 속의 스토리'를 전하는 코너입니다.
구광모 LG그룹 회장이 2018년9월12일 서울 마곡 LG사이언스파크를 방문해 연구원과 함께 '투명 플렉시블 OLED(유기발광다이오드)'를 살펴보고 있다. /사진제공=LG

"해답은 고객." 다분히 복고적이고 밋밋한 이 단어를 40대 젊은 총수 구광모 LG그룹 회장의 첫 신년사에서 발견했을 때 적잖게 당황스러웠던 기억이 난다. 구 회장이 2018년 6월 취임한 뒤 이듬해 처음 내놓은 신년사였다. 구 회장 취임 이후 반년 동안 주요 경영진 외부수혈을 비롯해 전대(前代)의 LG에서 보기 힘들었던 파격 행보가 이어졌던 터라 난데없이 등장한 1980년대풍의 '손님은 왕' 구호가 더 당혹스러웠는지도 모르겠다. 아무래도 MZ세대 총수에게 기대했던 혁신이나 새로움과는 거리가 있다는 평가가 많았다.

하지만 세간의 이런 입방아에 아랑곳하지 않고 구 회장은 그 뒤로도 '고객론'을 끈기있게 읊었다. "고객 가치 실천을 위한 LG만의 생각과 행동을 더욱 다듬고 발전시켜가야 합니다."(2020년) "고객과 더 공감하고 고객을 열광시키는 한 해를 만듭시다."(2021년) 2022년 새해를 열흘여 앞두고 구 회장이 앞당겨 발표한 임인년 신년사에도 '고객'이 키워드로 들어갔다. 구 회장은 "지난 3년 동안 고객의 마음으로 실천하기 위해 노력한 것은 모두가 중요하다고 공감하면서도 어려운 일이었다"며 "가치 있는 고객 경험에 우리가 더 나아갈 방향이 있다"고 말했다.

최근 들어 구 회장이 처음으로 고객론을 내걸었던 때와 달라진 게 있다면 '고객'을 경영 화두로 삼는 기업이 부쩍 늘었다는 점이다. 애플, 구글, 페이스북에 치여 기술과 혁신, 디지털을 앞세우던 기업들이 요즘엔 고객 가치 창출이라는 말에 힘을 준다. 재계 1위 삼성전자는 지난 7일 사장단 인사 이후 이어진 조직개편에서 고객 경험 중심의 사업가치를 강조하면서 기존 CE(소비자가전)부문 명칭을 DX(Device eXperience)부문으로, 모바일 사업부 명칭은 MX(Mobile eXperience)사업부로 변경했다. 기업과 업(業)의 본질에 대한 고민을 담았다는 설명이다.

고객 가치는 사실 표현만 달랐지 혁신과 다르지 않은 말이라는 게 최근 재계의 분위기다. 호사가들이 아이폰을 두고 '기존 기술의 짬뽕'이라고 깎아내릴 때 스티브 잡스가 "사람들은 직접 보여주기 전까지는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도 모른다"고 받아쳤던 것처럼 조그만 불편을 개선하려는 노력이, 그 노력을 이끌어내는 경험이 '새롭지 않은 새로움'을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어느 분야에서든 혁신을 이룬 이들이 이미 이뤄진 무언가에 자그마한 모래 한 알을 얹었을 뿐이라고 말하는 배경에 '써보는 입장에서 다시 한번'이 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돌아보면 구 회장의 선견(先見)을 선입견으로 바라봤던 대목을 반성할 수밖에 없다. 급변하는 트렌드에 맞춰 이제야 갑작스레 '고객 경험'을 혁신하자는 기업과 수년 동안 기초를 다져온 기업의 내공은 분명 어느 시점에 차이를 드러낼 것이기 때문이다. 성급한 평가일 수 있지만 구 회장 취임 이후 가전, 로봇, 전장, 배터리를 아울러 LG의 달라진 위상이 이미 그렇다. 어쩌면 구 회장이 그동안 고집스레 말하고 싶었던 것은 매순간 끊임없이 흔들리는 시류에서 결국 중요한 것은 본질에 대한 탐구라는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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