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도 모르는데 경제공동체?" 특수관계인 '경제 연좌제' 논란

한지연 기자
2022.02.14 05:25

[MT리포트]특수관계인 낡은 족쇄에 걸린 기업들②

[편집자주] 대기업 총수(동일인)의 특수관계인 자료 제출 의무와 관련해 시대착오적이라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특수관계인의 범위가 '총수의 6촌 이내 혈족, 4촌 이내 인척' 등으로 넓어 파악 자체가 힘든 상황에서 누락시 형사처벌까지 가능토록 하고 있기 때문이다. 친·인척 등 특수관계인에 대한 시대 변화나 전문경영인 중심의 IT 산업 부상 등 경제 환경 변화를 반영한 제도 개선이 시급하다는 지적이다.

'사돈의 팔촌'. 친족이라지만 얼굴은커녕 이름도 모르는 먼 관계를 뜻하는 관용어다. 핵가족화 같은 시대상의 변화를 시사하는 말이기도 하다. 대기업 총수들은 이런 시대 변화와 관계 없이 얼굴도 모르는 친족의 혼인과 출산 여부는 물론이고 사소한 투자까지 일일이 파악하는 일을 매년 반복해야 한다. 공정거래위원회의 대기업집단 지정과 관련해 동일인(총수)이 신고해야 하는 특수관계인의 범위(6촌 이내의 혈족, 4촌 이내의 인척)가 지나치게 넓다는 지적이 계속되는 이유다.

100~300명에 이르는 특수관계인의 정보가 하나라도 누락됐을 때 고의성을 파악하는 기준이 애매해 공정위가 다분히 자의적으로 판단하는 것도 학계와 재계의 비판을 받는 지점이다. 친족관계라는 이유만으로 경제적 권리를 제한하거나 과도한 다른 의무를 부과하면서 '경제 연좌제'라는 말까지 나온다.

얼굴도 모르는 친족이 경제동일인?

특수관계인의 범위가 현행 가족제도와 동떨어져 있다는 지적은 꾸준히 제기됐다. 경제법령상 특수관계인 규제는 대주주와 특수관계인이 경제적 이해관계를 같이 하거나 경제적 이익을 무상으로 나눌만큼 밀접하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친인척 등을 활용한 사익 편취 등 부의 집중을 견제한다는 목적인데 얼굴도 모르는 친족을 경제공동체로 볼 수 있는지 의문이라는 얘기다.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산하 한국경제연구원은 2019년 발표한 '특수관계인 관련 법령의 문제점 및 개선방안'이라는 제목의 보고서에서 "특수관계인의 범위에 포함되는 친족 등의 범위가 사회적, 경제적 현실을 전혀 반영하지 못하고 너무 광범위하다"며 "6촌이란 범위는 경제적 이해관계나 생활의 교류관계가 충분하다고 볼 수 없는 범위로 지나치게 비현실적"이라고 꼬집었다.

자료 수집에 기업이 직접 나서면서 발생하는 사회적 비용도 크다. 대기업마다 기업집단 지정 자료를 담당하는 부서 직원들은 공정위 제출 자료 시기가 가까워지면 밤을 새며 일하기 일쑤다. 신고가 의무인만큼 지분과 거래 관계가 전혀 없더라도 특수관계인 범위에 포함되면 일단 신고한 뒤 '친족 분리' 등 또 한번의 절차를 추가로 진행해야 한다. 1명이라도 누락되면 기업은 허위 자료 제출로 2년 이하 징역 또는 1억50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해질 수 있다.

법의 취지와 달리 단순누락에 대해서도 원칙적으로 형사처벌을 규정한 것을 두고 지나치다는 지적도 나온다.

또 다른 문제는 신고 의무만 있을 뿐 자료 수집에 대한 권한이 없다는 점이다. 특수관계인이 개인정보 등을 이유로 거부하면 기업만 발을 동동 구르게 된다. 유정주 전경련 기업정책팀장은 "특수관계인의 범위가 지나치게 넓어 본의 아니게 현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며 "의도치 않은 범법자를 양성하는 셈"이라고 말했다. 전경련에 따르면 특수관계인 신고가 누락되는 경우가 매년 수백건에 이른다. 1개 그룹이 신고 누락에 따른 벌금으로 수십억원을 내는 경우도 있다는 설명이다.

대기업집단 업무를 했던 한 대기업 관계자는 "연락도 안 하던 사람이 가족관계와 주식 투자 현황을 알려달라는데 누가 알려주겠느냐"며 "수집 권한이 없는 민간에 신고 의무를 부여한 뒤 제대로 되지 않으면 처벌하는 것은 행정편의주의이자 불공정한 처사"라고 지적했다.

모호한 규정·자의적 해석으로 기업은 '부담'·행정은 '불공정'
조성욱 공정거래위원회 위원장. /뉴스1

자료 누락의 고의성을 판단하는 기준이 모호한 것도 비판 대상이다. 고(故) 신격호 롯데 명예회장은 2015년 외손녀가 비상장사에 수백만원어치를 투자한 사실을 신고 누락했다가 법적 책임을 질 뻔했다. 공정위의 특수관계인 제도가 경제력 집중 견제라는 본래의 취지와 달리 일종의 '재테크' 신고누락을 문제삼는 잣대가 된 셈이다.

공정위도 이런 문제를 의식해 특수관계인의 주식 보유 신고 의무를 규정한 공정거래법 68조와 관련, 중대한 법 위반이 아닌 경우 '경고' 처분을 내려왔다. 업계에서는 공정위의 이런 자의적 판단을 두고 고무줄 잣대라는 비판이 나온다. 법적 안정성이 떨어진다는 얘기다.

2016년에는 카카오가 대기업집단으로 지정된 엔플루토 등 5개 계열사 관련 자료를 빠뜨린 혐의에 대해 공정위가 김범수 카카오 의장에게 경고 처분을 내렸다가 검찰에서 중대 사안을 고발하지 않고 봐줬다며 공정위를 압수수색하는 일도 벌어졌다. 당시 검찰은 김 의장을 약식기소했지만 대법원이 2020년 무죄를 선고한 원심판결을 확정하면서 제도 자체에 대한 또다른 논란을 낳았다.

재계 관계자는 "지금의 특수관계인 제도는 합리성과 공정성 등 거래의 성격을 살펴보는 것이 아니라 단지 친족이라는 이유만으로 거래를 모두 공개하라는 것"이라며 "규제로 인한 효과가 퇴색되는 구시대적 제도"라고 비판했다.

전문가들은 특수관계인의 범위를 시대 변화와 현실에 맞춰 혈족 4촌과 인척 2촌, 또는 혈족 3촌과 인척 2촌 수준으로 조정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한다. 신영수 경북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특수관계인 범위를 4촌 이내의 혈족과 배우자의 직계존비속 정도로 완화하는 방안이 합리적"이라고 말했다.

공정위도 특수관계인 규정이 시대착오적이란 지적을 받아들이고 개정을 내부 검토 중이다. 조성욱 공정위원장은 지난해 10월 말 공정위와 한국기업지배구조원이 공동 개최한 학술토론회에서 "탈가족화로 친족 개념이 변하고 있고 지금의 대기업집단 시책을 재검토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며 개정 가능성을 시사했다.

<저작권자 © ‘돈이 보이는 리얼타임 뉴스’ 머니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AI학습 이용 금지>